제목 | 주님 수난 성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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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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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8 | 조회수194 | 추천수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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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5일 아버지는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기차로 떠나는 성지순례 중이었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의 임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서울로 올라와서 조문객을 맞이할 수 있었고, 주교님을 모시고 아버지의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2020년 9월 10일 어머니는 하느님 품으로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저는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저는 뉴욕에 있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저는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팬데믹이었고, 이동이 제한되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 하였고, 교구장님이 주례하였습니다. 나중에 동창 신부님이 어머니 장례미사 영상을 보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하느님 품으로 떠난 지 14년이 되었고, 어머니는 하느님 품으로 떠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의 자녀로 충실하게 사셨으니,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신앙과 세상을 살아가는 분별력을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따듯한 감성과 헤아림을 주셨습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신앙이 제 삶의 이정표가 되었기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오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7가지의 말씀을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겨 주십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셔요.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거든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 아들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많이 지어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2)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예전에 어머니들이 말 듣지 않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너도 너 닮은 자식을 낳아 봐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몸소 겪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배반했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쳤던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십자가 너무 무거운 세 번이나 넘어지셨습니다.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십자가 위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십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나의 짐은 가볍고, 나의 멍에는 편하다.” 저도 유행성 출혈열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이 있습니다. 다리 골절로 수술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시련을 주셨지만, 시련은 저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3) 목마르다. 예수님께서는 타는 목마름으로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목마르다.” 예수님께서 목마르신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숨어버린 제자들 때문에 목마르셨습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 사도 때문에 목마르셨습니다.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 때문에 목마르셨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목마르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사람의 뜻을 따르려는 신앙인 때문에 목마르십니다. 착한 목자가 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사제들 때문에 목마르십니다. 오늘 나의 삶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예수님께 위로드리면 좋겠습니다. 4) 다 이루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다하였습니다.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악의 유혹이 있습니다.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입니다. 이 유혹 때문에 우리는 성당과 멀어지고, 이 유혹 때문에 우리는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유혹입니다. 남들이 빨간 불에 지나간다고, 나도 빨간 불에 지나가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다수결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결단입니다. ‘나는 안 돼’라는 유혹입니다. 유다는 나는 안 된다는 절망감으로 구원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베드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천국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우리가 마침표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5) 제 영혼을 맡기나이다. 우리는 나자렛의 성가정을 이야기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무엇으로 성가정이 되었을까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재물, 명예, 권력으로 성가정이 된 것이 아닙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동참하였습니다. 요셉은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했지만,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나자렛 성가정을 돌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신앙은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6)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옆에 있던 죄인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죄인은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의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낙원에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능력, 재능, 업적의 크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죽음의 순간일지라도 하느님을 찾는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7) 이 사람이 당신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성모 발현’의 표징으로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오늘도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달루페의 성모님은 남미 신앙인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루르드와 파티마의 성모님은 유럽 신앙인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성체성사에 온전히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식하며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고백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 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금요일입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가난한 이, 아픈 이, 소외된 이, 죄인들에게는 좌절과 절망의 수난이요, 죽음이었습니다. 기득권을 지키려 했던 대사제와 바리사이파들에게는 승리를 알리는 수난이요, 죽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빛의 승리요, 죽음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는 부활의 빛임을 알고 있습니다. 문득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예전에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절망의 눈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어둠의 승리요, 삶의 허무함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과 구원의 여정입니다. 오늘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주님의 얼굴을 닦아 드렸던 베로니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인의 길을 충실하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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