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영근 신부님_“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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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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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8 | 조회수73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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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말씀(4/18) : 성 금요일 * 제1독서 : 이사 52, 13-53, 12 제2독서 : 히브 4, 14-16. 5, 7-9 복음 : 요한 18, 1-19, 42
* <오늘의 강론> “갈보리의 노래 2”(박두진 시)
마지막 내려 덮는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 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강할 수가 있었는가? 파도 같이 밀려오는 승리에의 욕망을 어떻게 당신은 버릴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패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약할 수가 있었는가? 어떻게 당신은 이길 수가 있었는가? 방울방울 땅에 젖는 스스로의 혈적으로, 어떻게 만민들이 살아날 줄 알았는가? 어떻게 스스로가 신인 줄을 믿었는가? 크다랗게 벌리어진 당신의 두 팔에 누구나 달려들어 안길 줄을 알았는가? 엘리... 엘리... 엘리... 엘리... 스스로의 목숨을 스스로가 매어달아, 어떻게 당신은 죽을 수가 있었는가? 신이여! 어떻게 당신은 인간일 수 있었는가? 인간이여! 어떻게 당신은 신일 수가 있었는가? 아!--- 방울방울 떨구어지는 핏방울은 잦는데, 바람도 죽고 없고 마리아는 우는데, 마리아는 우는데, 인자여! 인자여! 마즈막 쏟아지는 폭포 같은 빛줄기를 어떻게 당신은 주체할 수 있었는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요,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하여 할 때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안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아멘.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주님! 오늘도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허약함과 악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알게 하소서. 그 사랑을 알고, 그 신비를 살게 하소서. 고통에서 기쁨을, 패배에서 승리를, 어둠에서 빛을, 죽음이 생명을 이끄소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어가고, 패배 당하여도 승리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네 쓰린 가슴에서 사랑을 퍼 올리소서. 무력함이 전능함 안에서, 비참함이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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