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토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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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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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8 | 조회수185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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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당은 조용합니다. 제단은 비어 있고, 촛불도 꺼져 있고, 성체조차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침묵 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기다림은 참으로 무겁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신 오늘, 하늘도 침묵하고, 땅도 잠잠합니다. 사도들도 숨어버렸고, 제자들도 흩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멈춘 듯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하느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듯한 이 순간,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 걸까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에는 고통받는 신자들, 배교의 갈림길에 선 사제, 그리고 침묵하시는 하느님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로드리고 신부는 고문당하는 신자들의 비명을 들으며 밤새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조용하시고, 그 침묵 속에서 신부는 절망합니다. 하지만 소설의 끝에 그는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멀리 떨어져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 그 짓밟히는 사람들의 숨결 안에 함께 계셨다는 것을. 그 침묵은 외면이 아니라 동참이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성 토요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친구가 보내 주었던 문자를 나누고 싶습니다. “드디어 여기 위니펙, 본당신부님께서 캐나다에 입국하셨고, 저는 전 본당신부님께서 귀국하신 후 6개월 만에 영성체하였습니다. 입대해서 훈련받다가 맞은 첫 미사, 냉담하다가 다시 주님을 찾아뵐 때의 그 감격과 같이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기쁨의 눈물이 났습니다. 이 감동 그대로 계속 살기를 주님께 청합니다. 그동안 사도를 기다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이나,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켰던 우리 조상들의 마음을 백분의 일 정도도 안 되겠지만 느꼈습니다. 우리의 두 분 신부님 김 신부님, 조 신부님 항상 건강하세요. 우리 친구들 주님의 은총 듬뿍 받으세요.” 친구의 문자를 읽으면서 마음에 잔잔한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는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고 큰 노력을 하지만 주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은 게을리했었습니다. 성 토요일의 빈 무덤은 사실상 그 어떤 말보다도 큰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보이지 않을 때도 믿을 수 있느냐?”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자리에, 희망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느냐?” 무덤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비어 있음은 부활을 위한 자리 비움입니다. 아직 부활은 선포되지 않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 삶에도 성 토요일과 같은 시간이 찾아옵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시간, 병상에서 고통받는 가족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시간,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어디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시간. 그 모든 순간이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침묵은 부재가 아닙니다. 그 침묵은 하느님의 가장 깊은 동행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길 기다리지만, 그분은 말씀이 아니라 침묵으로 우리 곁에 머무르십니다. 우리의 고통을 침묵 속에서 함께 느끼시며, 무덤처럼 차갑고 어두운 그곳 안에 부활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는 말하지 않고, 기다리는 날입니다. 빈 무덤 앞에서, 우리는 소리 대신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하느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침묵은 부재가 아니라, 사랑의 신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오늘은 아무 말 없이 그 무덤 앞에 서봅시다. 우리의 믿음이 다시 자라나기를 기도합시다. 성주간 토요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며, 나의 신앙이 행동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나의 신앙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다짐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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