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은총의 밤 / 파스카 성야 다해(루카 24,1-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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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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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18 | 조회수74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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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새 생명으로 건너가는 은총의 밤 / 파스카 성야 다해(루카 24,1-12) 한 여자가 남편, 시어머니와 함께 성지로 휴가를 갔단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졸지에 돌아가셨다. 그곳 장의사가 “5,000달러 지불하면 시신을 집으로 보내드리고, 150달러면 이곳 성지에 묻어드릴 수 있습니다.” 라고 의례적 제안을 했다나. 잠시 생각한 여자는 5,000달러를 기꺼이 내겠다며 집으로 꼭 보내달란다. 장의사는 너무 의아해서 물었다. “단돈 150달러면 여기서 쉽게 매장되는데, 굳이 비싼 돈으로 집으로 데려가는 그 이유가 뭡니까?” 여자의 신중한 답이다. “2,000년 전 여기서 그분 부활하셨는데, 그 부활 두 번 다시 결코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의 것이 될 게다. 그렇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셨기에 정의와 공정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예수님 부활로 진정 꼴찌가 첫째 되고 자신을 낮추는 이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분 부활로 섬기는 이가 참다운 주인이 되고, 죽음이 끝이 아닌,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징검다리가 되었다. 오가는 이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만 보일 게고, 만나는 이마다 미소가 느껴지고 내민 손마다 따뜻함이 묻어있으리라. 부활이 결코 없다는 신부님 설명이다. “지금 부활을 모르면 죽은 후의 부활도 모른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그 부활로 자신의 변화된 삶이 없다면 죽음 후의 그 부활 모른다. 지금 저 원수를 죽음 후에 만난다고 생각해보라. 저 원수, 더 큰 ‘원쑤’ 될 수도. 그러면 그 부활 진정 후회할 게다. 그러니 지금 털고 화해하라. 그때 꼭 화해하리란 꿈은 아예 접자.” 신부님 결론이다. 부활은 결코 미루는 게 아니란다. 부활은 지금 여기서 맛보고 느껴야만 참 부활을 누리는 것이라나. 죽음 후의 부활을 진정 바란다면 지금의 부활이 이루어져야 한단다. 사실 지금 변화로 부활의 삶을 누려야만 다가올 참 부활도 정녕 만볼 수 있다나. 따라서 이곳 부활 체험자만이 저곳 부활도 맛보리라. 부활의 은총은 지금 우리 곁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이렇게 부활은 단지 저 먼 세상의 것만이 결코 아니다. 살면서 자주 체험하는 거다. 진정 부활은 죽은 후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죽어서만 일어난다면, 지금 신비는 진정성이 없다. 부활하신 주님 만남은 지금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지금 우리의 부활 체험으로 누리지 못한다면, 그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스스로가 부활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것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께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것처럼 우리 또한 미움에서 사랑으로, 다툼에서 화해로, 불평에서 감사로 건너가는 변화를 지금 해야만. 이 부활의 삶은 새로운 희망으로 영광스러운 십자가를 질게다. 희망 없는 십자가는 죽음의 고통만 전하지만, 희망의 십자가는 생명의 기쁨을 충만케 한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오시어 참으로 부활하셨다.
부활 성야 미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여 전례에서 가장 성대할 게다. 교회는 이 장엄한 전례를 통하여 죽음을 이기시고 참된 승리와 해방을 이루신 그분 부활을 가장 깊게 되새긴다. 이제 온 누리에 찬란한 빛 밝혀지리라. 이 밤 주님께서 죽음 이기시고 생명으로 건너셨다. 세례와 성찬으로 하느님께 건너가는 거룩한 밤이다. 이 밤 예수님께서 늘 우리 곁에 살아 계심을 믿고, 그분이 우리와 함께 머무시고자 다시 오실 재림의 그날을 차분하게 새기자. 오늘 이 밤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초대하는 은총의 밤이다. 이 기쁨 함께 나누자.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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