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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우리의 평생공부는 파스카의 예수님 공부이다 “
작성자선우경 쪽지 캡슐 작성일2025-04-20 조회수59 추천수6 반대(0) 신고

2025.4.20.주님 부활 대축일                                             

 

사도10,34ㄱ.37ㄴ-43 콜로3,1-4 요한20,1-9

 

 

 

우리의 평생공부는 파스카의 예수님 공부이다

“사랑하라, 선포하라, 희망하라”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이 평생 인생 학교에서 평생 공부해야할 분이 죽으시고 오늘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어느 유명 교수의 인터뷰 내용에 공감했습니다.

 

-“교수님께 공부란 무엇입니까?”

“제 일상입니다. 저는 일과 놀이의 경계가 없는 직업을 갖고 있어요, 좋아서 하는 일이 바로 공부니까요. 시간을 내서 하는 일은 운동과 산책입니다. 몸이 망가지는 것을 막는 일이죠. 그래야 공부할 수 있으니까요”

 

저에게도 파스카 예수님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은 제 일상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나이에 관계없이 평생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인 수도원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형제들이 평생공부에 평생학인들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영원한 현역의 학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자랑스럽고 감사한 일입니다. 

 

“공부란 무엇인가?”

제 일상인 공부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는 기도와 공부와 일의 경계가 없습니다. 모두가 배움의 여정중 공부에 해당되니까요. 얼마전 공동전례기도시 본의 아니게 이웃수도형제에게 불편을 주는 것에 깊이 깨닫고 반성했습니다.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겠는지, 그래서 다음 사항 공부에 주력하기로 했습니다.

 

날로 너그러워지고 자비로워지고 지혜로워지는 공부입니다.

날로 작아지고 낮아지고 비워지고 겸손해지고 온유해지는 공부입니다.

날로 진리를 깨달아 가면서 내적으로 자유로워지고 부유해지고 행복해지는 공부입니다. 이런 공부가 아니라면 그 공부 무슨 소용이 있을런지요.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 사랑 공부가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켜 줍니다.

 

바로 이의 대표적인 분이 얼마전 96세 선종하신 초대 안동교구 주교였던 두봉주교입니다. 참 섭리적인 진리를 어제 소스라치게 깨달았습니다. 4월20일 주님 부활대축일 가톨릭교회 양대신문, 가톨릭평화신문, 가톨릭신문 각각 3면 정도가 두봉 주교님 장례미사 기사였습니다. 순간 “주교님은 장례미사시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셨구나!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고 공부에 전념한 주님의 평생학인, 평생제자답구나!”하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습니다.

 

“기쁘고 떳떳하게”

평생 좌우명처럼 평생 시종여일 이웃에게 짐이 되지 않고 선물처럼 기쁘고 떳떳하게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4.10일 선종전 마지막 남긴 임종어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감사’ 남기고 아버지 품으로”

“두봉 주교, 한국 선교 여정 마치고 주님 곁으로”

양대 신문 머릿기사처럼, 평생 기쁘고 떳떳하게, 감사하며 자유롭게 주님의 향기로 성인처럼 살다 떠나신 분이라 수많은 지인들이 나눈 아름다운 추억들에 관한 일화도 차고 넘쳤습니다. 

 

명실공히 가톨릭의 명품종교인답게 명품신자, 명품인생을 사신 참 멋진 명품주교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주님의 평생학인으로 이렇게 주님의 향기처럼, 명품인생, 명품신자로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미사전례중 말씀이 답을 줍니다.

 

첫째, “사랑하라!”입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납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맨먼져 부활하신 주님의 빈무덤을 발견한 것은 예수님을 평소 열렬히 사랑했던 여제자들이었고 빈무덤에 쏜살같이 달려간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빈무덤을 보는 순간 케노시스의 비움을 통해 부재로서 현존하시는 역설적 파스카의 예수님 부활을 직감적으로 체험한 애제자의 주님 사랑이었습니다. 앞서 뛰었지만 겸손한 사랑으로 수제자 베드로 다음 입장한 애제자는 잘 정돈된 빈무덤을 보는 순간 전광석화, 복음사가는 “그리고 보고 믿었다.”로 그를 묘사합니다. 텅빈 충만은 너무나 자명한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현존이었던 것입니다.

 

둘째, “선포하라!”

복음의 애제자 요한이 사랑의 본보기라면 제1독서 사도행전의 베드로는 믿음의 본보기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베드로는 그 예전에 세 번씩 주님을 배반하던 유약한 모습이 아닙니다. 믿음의 모범이 되어 열렬히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합니다. 애제자 요한의 사랑의 관상은 베드로의 믿음의 선포 활동으로 이어져야 자연스런 순리입니다. 참으로 힘찬 확신에 넘친 베드로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그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 뒤에 우리는 그분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확실한 증언이 어디있겠습니까! 도저히 거짓말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진실하고 순박한 사도 베드로의 진정성이 넘치는 주님 부활체험의 믿음의 고백입니다. 

 

셋째, “희망하라!”입니다.

애제자이자 관상가 요한에 이어 수제자이자 활동가 믿음의 사도 베드로에 이어 제2독서 콜로새서의 희망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이런 희망에서 샘솟는 선포활동입니다. 사랑과 믿음의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입니다. 희망이 있어야 타락 변질되지 않고 고귀하고 존엄한 품위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죄악의 유혹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천상의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가 바로 희망의 샘입니다. 주님께서 희망의 사도 바오로를 통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희망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자 희망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자 빛이신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이미 늘 맑고 푸르른 지상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파스카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늘 주님을 평생공부하는 평생학인이 되어,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면서 주님의 자녀답게, 신망애信望愛의 명품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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