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주님 부활 대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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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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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20 | 조회수74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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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보고 믿었다.“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이 되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라고 서로 인사합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돌아가신 주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에, 비로소 우리가 죄의 그늘에서 벗어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희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학적 설명을 듣고 이해한다고 해서, ‘주님의 부활을 기뻐해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의무적으로 순명한다고 해서 부활의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그랬듯이 주님이 내 삶에서 정말 소중한 존재라고 느껴질 정도로 그분을 사랑해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내가 직접 만나고 그분의 현존을 느껴야만 참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아무에게나’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특별한 이들에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고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주님을 만나는 기쁨과 영광을 누릴 이들을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셨다는 말을 그분께서 당신 기준에 맞는 이들이나 당신께서 편애하시는 이들을 ‘선별’하셨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인 우리를 차별 없이 공평하게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변화되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부르시는데, 그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는 이들과 외면하는 이들로 나뉘어질 뿐인 겁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최소한’에 머무르며 소극적으로 임하려 드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그런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십니다. 주일미사만 빠지지 않는 최소한에 머무르고, 하느님 뜻을 따르며 살기 위한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은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면서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무의미하게 느껴져서 힘들다고 하시니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물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 능력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은총’입니다. 그런데 그 은총은 내가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나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주님을 잃은 슬픔, 주님으로 인해 고통과 시련을 겪게 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분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무덤을 찾은 여인들처럼, 나 역시 주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야하고 적극적으로 그분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을 찾았다면 그분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분 뜻을 따라야 합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무엇을 봐야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깨닫고 느낄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부활하신 주님을 찾는 우리를 그분의 ‘빈 무덤’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여러가지를 ‘보게’ 합니다. 주님의 무덤을 단단히 막아두었던 큰 돌은 한 쪽으로 치워져 있었습니다. 그분의 시신을 고이 잘 감싸두었던 아마포는 풀어헤쳐져 있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한쪽에 따로 잘 개켜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님의 시신이 거기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상황들 자체가 주님의 부활을 논리적,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또한 성경의 어느 부분에서도 주님께서 대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부활사건 자체를 직접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이천 년 전 그분의 빈 무덤을 처음 목격한 제자들도 그랬고, 오늘날 그분 현존의 증거를 찾는 우리도 그렇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의 부활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참으로 간략하게 딱 다섯 글자로 언급합니다. “보고 믿었다.” 그저 단편적인 정보들 몇 가지만 보고 어떻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게 된 것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주님 부활 대축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념하는 날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라틴어로는 ‘파스카’(Pascha)라고 하는데 이는 ‘지나가다’, ‘건너가다’, ‘넘어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고통과 죽음을 지나 구원과 영광으로 건너가셨음을, 유한하고 불완전한 이 세상에서 영원하고 완전한 저 세상 즉 ‘하느님 나라’로 넘어가셨음을 기념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파스카 축제를 지내는 우리도 주님처럼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유혹을 지나가야 합니다. 그저 욕망과 본능에 따라 살아가는 동물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왜’ 사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생각하는 삶으로 건너가야 합니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이웃의 슬픔과 고통을 나의 일로 여기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평화와 일치의 삶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보면 우리 일상 곳곳에 숨어있는 주님 현존과 사랑의 흔적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에 가시어 그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주님을 만나고 싶다면 성전에서만, 거룩하고 엄숙한 전례 안에서만 그분을 찾을 게 아니라, 내가 숨쉬며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믿음으로, 내 욕망과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합니다. 쉽고 편한 것만 찾으려는 나태함과 안일함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그러듯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쫓지 말고 무엇이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인지를 잘 생각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사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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