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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사랑이 사랑을 알아보게 합니다.>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03:52 조회수12 추천수1 반대(0) 신고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쪽으로 몸을 굽혀 들여다보니 하얀 옷을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 한 천사는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자리

머리맡에, 다른 천사는 발치에 있었다. 그들이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마리아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리아는 그분을

정원지기로 생각하고,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 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요한 20,11-18).”

1)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께서 이름을 부르신 다음에 알아보게 된 일에

대해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셔야만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로 해석합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마주친다고 해서

아무나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앞의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1-23)”

2)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말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는 일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두 가지 일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어떻든,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만나는 방법”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은,

바로 앞에 예수님이 계셔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저분은 예수님이라고 알려 주어도,

그 말을 믿지 않고, 예수님이라는 것을 부정합니다.>

3)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부활 신앙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고, 어리석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옮겨 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막달레나의 눈을 열어 주셨고,

막달레나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막달레나를 당신 ‘부활의 첫 증인’으로

삼으신 일입니다.

“왜 막달레나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랑, 열정, 헌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막달레나가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사도들과 성인들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적을 일으킨

일들이 있긴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완전한 부활’은,

아직은 예수님의 부활 외에는 없습니다.

신앙인들이 희망하는 것은 이승에서의 수명 연장이 아니라,

마지막 날의 부활이고(요한 11,24),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그 희망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5) 17절의 예수님 말씀을 뜻에 따라 다시 정리하면,

“나를 만지지 마라. 너는 가서 내 형제들에게 말하여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지만,

곧 올라간다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달레나에게 전하라고 시키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당신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곧 승천하신다는 것.

아마도 막달레나는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곧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부활의 첫 증인’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쁜 소식을 처음으로 선포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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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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