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
---|---|---|---|---|
작성자최원석
![]() ![]() |
작성일2025-04-23 | 조회수96 | 추천수3 |
반대(0)
![]() |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19-27).”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0-32)”
1) 여기서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분’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셨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실망감이 너무 커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되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뿐만 아니라 당시의 신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 전에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있었고, 부활 후에는 “처음부터 부활로 직행하면 좋았을 텐데, 왜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는가?” 라는 의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는, 부활 전의 실망감과 부활 후의 의문이 모두 반영되어 있는 이야기입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던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바로 그날이고, 예수님을 만난 시간은 그날 오후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무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여자들의 증언을 들었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실망감이 너무 커서 부활을 믿지 못했고, 또 사실 그 당시에는 ‘부활’ 자체를 믿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던 때였기 때문에 두 제자를, 또는 당시의 신자들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두 제자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에 ‘메시아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셨습니다.>
2) “아, 어리석은 자들아! ......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라는 말씀은, “왜 성경 말씀을 믿지 못하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부활을 안 믿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이라는 말은, 메시아가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로 번역을 바꿔야 합니다. <이 말씀은, 부활 전의 실망감과 부활 후의 의문들을 모두 겨냥하신 말씀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설명은,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 십자가를 생략하고 곧바로 부활로 직행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그 일들은 모두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신 일이라는 것 등입니다. <십자가의 이유에 대한 설명은 사도들의 편지에 있습니다. 인간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속죄 제물이었다는 것. 예수님과 사도들의 설명 덕분에 신자들이 실망감과 의문에서 벗어나기는 했어도, “왜 꼭 십자가이어야만 했는가?”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하나로 합해서 ‘파스카의 신비’ 라고 표현합니다. ‘신비’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믿지만,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3) 32절의 ‘마음이 타오르다.’ 라는 말은, ‘감동을 받았다.’ 라는 뜻입니다. <말씀의 전례 때, 또 성찬의 전례 때에 어떤 영적인 감동을 받게 되면, 그것은 곧 예수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표지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처럼 아직 부활 신앙이 없어서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고, 나중에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증언은,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께서 사라지셨다는 증언입니다. <두 제자가 알아보았기 때문에 사라지셨다는 증언이 아니고, 알아보았고 믿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어도 믿음과 감동과 기쁨에 변함이 없었다는 증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믿는다면, 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면 더 좋겠지만, 안 보여도 상관이 없다는 증언이고 고백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