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주님의 일꾼인 것 자체로 존중해야 하는 이유> 복음: 루카 24,35-48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드디어 당신 사도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이들은 정말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음식을 드시고, 성경까지 설명을 해 주십니다. 이렇게까지 당신을 드러내신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도들에게 어떻게 해서든 당신 부활을 믿게 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심부름시키는데 무엇을 하라고 알려주지 않을 수 없듯, 파견하는데 사명을 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문제는 주려고 하는 마음과 그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의 차이입니다. 마음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든 생각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명을 받아들인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모두 그것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이것이 사명을 받아들임과 아닌 사람의 차이이고 그에 따라 주어지는 은총도 다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들은 맹세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절실함이 은총을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는 가난하다는 이유로 더 많은 표를 얻고도 급장을 하지 못하고 부급장이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애순이 어머니는 가만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급장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자녀가 억울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밭을 갈아주고 진주목걸이를 차고 떡과 봉투까지 넣어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갑니다. 담임 선생에게 화를 내도 모자랄 판에 머리를 깊이 조아리며 애순이를 잘 부탁한다고 말합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다른 건 다 봐도 자녀가 억울한 것은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는 것도 마찬가질 것입니다. 은총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공표하여 그렇게 여겨지는 사람에게 더 주어집니다. 그러니 그 은총이 아니면 자신은 아무런 존재가 아니게 자신을 몰아붙여야 합니다. 부모가 계신 데도 그런 억울한 상황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오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증인은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면 억울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파견된 자로 섰습니다. 모세는 “두려워하지 마라. … 주님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다.”(탈출 14,13‑14)라고 백성 앞에서 선포한 뒤, 물러설 곳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지팡이를 들었습니다. 그 즉시 홍해가 갈라져 길이 열렸습니다. 홍해 앞에서 사실 모세보다도 하느님께서 기적을 주지 않으시면 안 되는 막다른 상황에 몰렸다고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나아가십시오. 이스라엘 모든 군인이 두려워 떨던 거인 골리앗 앞에 어린 목동 다윗이 나섭니다. 그는 하느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이스라엘을 대표해 싸우겠다고 '자원'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갑옷도 거절하고 평소 쓰던 물매와 돌멩이만 들고 나갑니다. 이는 인간적인 힘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자신의 역할(하느님의 용사)에 대한 확신을 보여줍니다. 이 절실한 믿음과 공표된 역할 수행 의지에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용기와 기술(은총)을 주셔서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하셨습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인도 콜카타 빈민가 한복판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서약하자, 단돈 5루피로 시작한 사도가 전 세계 130개국으로 퍼졌고, 살아있는 동안 500여 곳의 선교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주님으로 나아가는데, 주님은 사람들을 실망시켜 당신의 능력이 약하게 보임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서원하십시오. 선포하십시오. 파견되십시오. 그렇게 자신을 막다른 곳으로 모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은총을 주지 않으실 수 없으십니다. 그러니 본당에서도 ‘선교사’란 이름을 다십시오. 그러면 더 큰 은혜가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본당의 봉사자로서 이름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그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선포되었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이 그 일을 하도록 은총을 주시지 절대 실망하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성당 봉사자 건, 선교사 건, 수도자 건, 사제 건, 주교 건, 교황이건 그 맡은 직무 자체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 일을 하기 위해 결단을 내린 것 자체, 그리고 그 결단에 합당한 은혜를 주시는 하느님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