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번외 묵상 / 철장석심(鐵腸石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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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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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4-25 | 조회수81 | 추천수1 |
반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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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장석심(鐵腸石心)-
철장석심(鐵腸石心)이란 굳센 의지나 지조(地曹)가 있는 마음을 비유(比喩)하는 말로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말 못 하는 짐승도 주인을 배신(背信)하지 않는 판국에 시시비비를 떠나 소위 조직(組織)의 리더라고 자처했던 자들의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비굴한 모습을 보며 측은함을 넘어 처참해지는 작금(昨今)의 시국에서 조선시대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 불렀던 만고(萬古)의 충신(忠臣) 성삼문(成三問)과 낙락장송(落落長松)이 떠올라 몇 자 적어봅니다.
북풍한설(北風寒雪)에도 끄떡없는 낙락장송 소나무는 늘 푸른 모습을 띠는 것에서 굳은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를 지키는 사람의 됨됨이를 표현(表現)하고 있습니다만,
우리 한민족은 소나무를 무척이나 좋아해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는 국보180호로 지정되어 있고,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낙락장송의 '절의가'를 읊었습니다.
또한, 나무 중 단연 으뜸으로 흔히 송수천년(松壽千年) 송백불로(松栢不老) 장수의 상징으로 불리며, 두 개의 잎은 낙엽(落葉)이 되어 떨어질 때도 서로 하나가 되어 부부애(夫婦愛)의 상징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단종(端宗)의 복위를 꾀하다 생을 마감한 성삼문(成三問)은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 출신으로 비록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그가 남긴 업적(業績)은 실로 다양한데도 사육신(死六臣)이라는 상징성으로 인해 충신과 지사로만 평가받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세종(世宗)이 정음청을 설치하고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할 때부터 참여하여 한글문화 창달(暢達)에 크게 공헌(貢獻)했습니다.
이처럼 성삼문(成三問)은 단종(端宗) 복위(復位)에 앞장섰으나 발각돼 38세를 마지막으로 처형(處刑)되었는데, 거사 실패로 잡혀 고문(拷問)을 받을 때 거취를 분명히 하라며 세조(世祖)가 묻습니다. 그러자 성삼문(成三問)은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하리라."라고 답해버립니다.
세조(世祖)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意志)를 알게 됐고 세조가 직접 심문할 때도 끝내 왕(王)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라고 불렀습니다.
세조가 다시 묻습니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給與)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上王(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臣下)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 보라고 합니다.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즉위 첫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 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답니다.
이런 태도(態度)에 화(火)가 난 세조는 쇠를 불에 달궈 담금질로 성삼문(成三問)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으나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 추상같이 말합니다. 국문(鞫問)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형장(刑場)으로 가면서도 성삼문은 한 수의 시를 읊습니다.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네. 저승으로 가는 길엔 주막(酒幕)도 없다는데 이 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리오?"
돌아보니 어린 딸이 울면서 따라옵니다. 이에 성삼문은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살겠구나" 하면서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합니다.
비록 죄인이 되어 형장(刑場)의 이슬로 사라질지언정 끝까지 지켰던 지조(志操)와 절개(節槪)는 작금의 대혼돈의 시대에 이합집산(離合集散)을 넘어 한낱 금수만도 못한 위정자(爲政者)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덕목(德目)이 아닐는지, 과연 어디다 울분을 토해내야 할지 개탄스럽기만 합니다.
(전 총회장님이 보내온 톡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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