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부활 제2주일 다해, 하느님의 자비주일] | |||
---|---|---|---|---|
작성자박영희
![]() ![]() |
작성일2025-04-27 | 조회수57 | 추천수1 |
반대(0)
![]() |
[부활 제2주일 다해, 하느님의 자비주일] 요한 20,19-31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습니다. 공항에 내리시던 순간에도, 광화문에서 시복 시성미사를 집전하실 때에도, 바쁜 방한 일정을 수행하시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세월호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을 만나 손을 마주잡고 진심어린 위로를 전하셨지요. 또한 한국에 머무르시는 동안 내내 세월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색 리본을 옷에 달고 다니셨는데, 어느 기자가 그 점을 두고 ‘한국에서 세월호 문제는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으로 번지고 있어서 노란 리본을 달고 계시는 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교황으로써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답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슬픔과 고통을 겪는 이에게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다가가 위로하고 힘을 주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비를 보여주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진정한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면 정치나 중립 운운하며 사람들 눈치를 볼 게 아니라,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최우선으로 실천해야 되는 겁니다.
오늘은 부활 팔일 축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제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자비를 만나게 되지요. 마리아 막달레나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증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내몰았던 반대세력들이 두려워 집 안에 틀어박힌 채 문까지 모두 잠가놓고 있었지요. 예수님께서 그런 그들을 찾아가십니다. 당신 부활에 대한 증언을 불신하는 그들의 완고함을, 당신의 유언을 따르지 않은 그들의 불순종을 질책하거나 비난하실 법도한데, 오히려 평화가 그들과 함께 하기를 빌어주십니다. 더 나아가 당신을 배신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시고, 복음 선포라는 중대한 소명을 맡겨 다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일을 맡긴다는 건 그만큼 그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배신했던 사람, 이미 그 일로 큰 실패를 경험했던 사람에게 다시 같은 일을 맡기지는 않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그들을 믿어주시고 그들이 잘 할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십니다.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는 첫번째 표징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신 자리에 토마스가 없었고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토마스’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완전하시다’라는 뜻이지요. 그래서인지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데에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는 완전한 증거를 요구합니다. 혹시 제자들이 예수님의 ‘유령’을 보고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지 의심한 것입니다. 그들이 목격한 것이 예수님의 유령이 아니라 진짜 부활하신 그분이 맞다면, 유령과는 달리 ‘살과 뼈’가 있을 것이기에 자기 두 눈으로 그분 상처를 직접 확인해보고 만져봐야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게 하셨음을 완전히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확인하고 검증해야 사람들 앞에서 그분의 부활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태도를 ‘믿음’이라고 볼 수 있을까 싶지만, 예수님은 토마스가 바라는대로 해주십니다. 여드레 뒤 모든 제자가 모여 있을 때에 그들 앞에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시지요.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며칠 전 했던 말 그대로 인용해서 말씀하시니 토마스는 마음이 뜨끔하고 많이 놀랬을 겁니다. 그리고 깨달았겠지요. 선입견과 편견에 가려진 그의 눈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주님은 토마스가 당신을 의심하던 그 순간에도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심지어 부족한 자기 믿음을 채워주시기 위해 당신 상처를 벌리고 헤집는 아픔까지 기꺼이 감수하셨음을... 그런 분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는 주님께 꼭 외치고 싶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주님의 크고 깊은 사랑과 자비를 절절히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 고백이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는 두번째 표징입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는 비단 토마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단 전체에게 하신 말씀이며,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과 함께 하는 기쁨은 너무나 충만하고 강렬했지만 그것이 언제까지고 계속될 수는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고 나면 더 이상 그분을 보거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기에,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도 그분의 현존과 사랑을 믿는 보다 높은 차원의 믿음으로 나아가야만 했지요. 그런 점은 오늘날 신앙생활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주님의 현존을 직접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기도 중 혹은 피정 중에 강렬한 신비체험을 함으로써, 혹은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서 보살펴주심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은총을 누림으로써 간접적으로 느껴볼 뿐이지요. 게다가 그런 놀라운 체험을 해 볼 기회도 잘 해야 일생에 한 두번 정도 밖에 안됩니다. 그러니 그 기회가 또 찾아오기만을 막연히 기다리며 무의미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건 우리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은혜로운 체험을 가슴 속에 소중히 간직한 채 ‘보지 않고도 믿는’ 참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주님은 토마스를 통해 우리를 그런 참된 신앙으로 이끌어주고자 하십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참된 진리는 그것을 입증하는 증거를 먼저 보아야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먼저 믿어야 깨달을 수 있는 것임을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증거가 우리의 믿음을 보증해 주는 게 아니라 주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이 우리가 그분께 거는 희망을 보증해주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참되고 소중한 가치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을 깨우쳐주고자 하십니다. 그런 섬세하고 자상한 배려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드러내는 세번째 표징입니다.
주님께서 이상의 세 가지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이유는 우리에게 중대한 소명을 맡기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의 숨을 불어넣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권한을 실행하는 것이 내 마음대로 결정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실행해야만 하는 ‘의무’로 나에게 주어졌음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함께 사는 이웃 형제 자매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야 하는 중대한 소명이 맡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얼마나 충실히 수행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행복의 크기가 커질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자비의 소명을 충실히 실천하여 그분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겠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