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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영진 신부님_<지복직관>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05-03 조회수45 추천수3 반대(0) 신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6-14)”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예수님 말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하느님의 모습을 ‘구경’하고 싶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믿음보다 더 강한 ‘확신’을

갖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는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필립보 사도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흔들리는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줄 강력한 무엇인가를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2) 구약성경 탈출기를 보면,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빠지는 바람에 몹시 힘들어 하던 모세가

하느님을 직접 뵙기를 간청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세가 아뢰었다.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네 앞에서 ′야훼‵ 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셨다.

‘그러나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여기 내 곁에

자리가 있으니, 너는 이 바위에 서 있어라. 내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너를 이 바위굴에 넣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내 손바닥으로 덮어 주겠다. 그런 다음

내 손바닥을 거두면, 네가 내 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얼굴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탈출 33,18-23)”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는, “당신의 영광스러운

얼굴을 보여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되면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또 그 확신을

통해서 새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긴

했는데, 당신의 ‘얼굴’은 보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비천함

사이의 큰 간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박해 때문에 몹시 힘들어 하고 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셔서 직접 만나 주셨는데, 그때에도

엘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지는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엘리야 예언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열왕 19,12).>

3) 묵시록을 보면, 모세와 엘리야도 뵙지 못했던

하느님의 얼굴을, 하느님 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뵙게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곳에는 더 이상 하느님의 저주를 받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도성 안에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있어,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3-4).”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사랑이신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그 ‘완전한 일치’를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는 행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행복을 ‘지복직관’이라고 부릅니다.

지복직관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 가운데에서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사도들과 신자들은

그 행복을 누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부활 전에는 아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이 그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4)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일’, 즉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 체험을 하고, 그 행복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통해서 더욱 깊은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동시에 자신의 사랑 실천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그 행복으로 인도합니다.

신앙인은 사랑이신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한 사람이고, 그 행복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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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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