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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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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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03 | 조회수50 | 추천수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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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요한 14,6-14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구원으로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시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직접 드러내 보여주시지 않고, 당신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만 보여주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약함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모습을 직접 보게되면 우리는 전능하신 그분의 존재에 압도되어 로보트처럼 하느님께 ‘절대복종’할 것입니다. 그러나 강력한 위력 앞에 굴복하여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건 사랑에서 우러나는 참된 순명과는 거리가 멀지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스로의 의지와 결단으로 그분의 뜻을 따름으로써 하느님과 온전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 비로소 우리가 희망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필립보는 그런 예수님의 깊은 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가 평소 직접 보고 듣는 것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게 된 계기도 예수님 곁에서 함께 지내면서 그분 말씀을 직접 듣고 그분이 사시는 모습을 직접 지켜본 결과였지요. 그래서인지 하느님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아는데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 눈으로 직접 하느님을 뵙게 해달라고, 자신은 그래야만 하느님 현존의 증거가 충분하다고 느낄거 같다고 말하는 겁니다. 물론 오늘날 신앙생활 하는 우리도 필립보와 같은 바람을 마음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직접 볼 수만 있다면,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놀라운 기적을 직접 체험할 수만 있다면, 어떤 의심과 불신, 걱정과 두려움도 없이 하느님을 확실히 따를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부족하고 약한 우리 존재만큼,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의 감각도 불완전하기에 그런 식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는 오히려 그분에 대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소지가 큽니다. 그런 점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필립보가 ‘보다’라는 뜻을 나타낼 때 서로 다른 동사를 사용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지요. 필립보가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그리스어는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뜻입니다. 필립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전능하신 현존을 그 누구도 감히 부정하거나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과시하듯’ 보여주시기를, 그리하여 자기 마음 속 의구심을 말끔히 해소해 주시기를 바란 겁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보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그리스어는 ‘믿음의 눈으로 보아서 깨닫게 되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께 당신 현존과 사랑의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깊이 헤아림으로써 일상의 평범한 사건들 안에도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이 스며있음을 깨닫기를 바라신 겁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100% 완벽한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건 인정이자 납득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불확실성과 두려움을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의탁을 통해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택의 순간에 그분 뜻에 맞는 것을 내 의지와 결단으로 기꺼이 택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구원이 가능한 법입니다.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필립보와 야고보 사도도 그런 참된 믿음을 통해 사도로 변화되었고, 하느님 나라로 건너갈 수 있었음을 기억합시다.
* 함 승수 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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