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한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 사랑을 묵상해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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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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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03 | 조회수108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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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감정 이런 걸 사람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느끼고 생각하는 게 어떻게 다를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실험을 할 수 없어서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사람에 대해선 합리적인 추론으로 논리를 전개할 수 있고 어느 정도 기술과 장비로 실험도 가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생각으로 추정을 하는 게 아니고 정확한 데이터에 근거해 팩트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실험은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연구가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성은 남성보다 어떤 수치를 분석하면 자세히 알 수 있는데 남성은 그게 좀 부족하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그것도 세 번입니다. 한국어로는 같은 의미의 사랑이지만 원어로는 다 다른 의미의 사랑입니다.
10년 전쯤에 보좌 신부님이 강론하셔서 알게 된 사실입니다. 세 가지 내용은 각각 기억하는데 그 순서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오늘 베드로는 마지막에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못 믿어서 세 차례나 확인을 하시는지에 대한 섭섭함 같은 게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 못 했던 것입니다. 각각 다른 의미의 사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 사랑이라는 단어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랑의 뜻을 가지고 그 뜻을 다 똑같이 적용해 해석하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단일한 감정 하나로 추상적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사랑이라는 정신적인 감정은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합니다. 이때의 남자는 이성으로서의 사랑입니다. 딸로서 아빠를 부모로서 사랑할 때 이때 생물학적으로는 아빠라 남자에게 하는 사랑 같은 감정을 줄 수는 없는데 아빠이긴 하지만 그걸 배제하고 순수하게 딸의 입장이 아닌 여자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때를 기준으로 아빠를 바라보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사랑이라는 것도 신분, 위치, 환경 등등 여러 가지 경우에 따라 다 다른 느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사람 같은 경우에는 그 사람 속에서 작용하는 인체 내 호르몬에 의해서도 그 느낌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 많은 내용을 언급했습니다. 잠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처럼 그런 사랑이든 인간적인 사랑이든 사랑은 다 좋은 것입니다. 근데 그 사랑은 오래가야 합니다. 사랑의 유통기간이 오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 몸에서 자기만의 고유 사랑 호르몬이라는 게 있습니다. 이건 제가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든 개념입니다. 이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사람이 있고 적게 분비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건 그 사람의 신체적인 특징에서 나타나는 차이 때문도 그럴 수 있지만 실제 연구를 해보면 이것도 하나의 훈련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호르몬은 사람이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훈련을 하면 그 훈련에 의해 분비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사실입니다.
제가 자세한 내용은 말씀드리기가 좀 곤란하지만 사실입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요 이제 잠시 복음이나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와서 말씀드리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이것도 그냥 하라고 하시니 하면 되는 그런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맞는 말씀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게 실천이 잘 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실천하기 어려워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훈련이 부족돼 그런 감정의 호르몬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 사랑의 호르몬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안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아무리 자선을 많이 베풀어라고 해도 자기가 가진 게 없으면 자선을 베풀지 못하는 것처럼 사랑도 그런 것입니다. 그럼 이런 사랑을 어떻게 훈련해야 할까요?
그건 일반적인 상식과도 같은 사랑을 사랑이라고 하면 절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랑은 실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랑은 실제 문자적인 뜻은 복음에 나타나지 않지만 복음 행간에 녹아 있는 뜻은 있습니다. 바로 희생이 녹아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 조건은 모든 사랑에 다 적용되는 개념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배제되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또 다른 의미가 희생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고 하는 프로에 나올 만한 사랑 하나를 언급하겠습니다. 실제로는 그런 곳에 나오지도 않은 사례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식을 올리고 피로연을 마치고 신혼여행을 가다가 도중에 신부가 쓰러져 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원인 불명의 병으로 반신불구의 몸으로 살아야 되는 처지의 몸이 됐습니다. 긴 사연 상세하게 전할 수 없고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결혼식만 올린 그런 부인을 근 25년 세월을 간호했다고 합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제가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사고가 난 후 26년 정도됐을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차차 신경이 서서히 회복되어 갔고 또 의식도 거의 돌아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이런 걸 사랑이라고 만약 한다면 과연 어떤 심성을 가지고 태어나야 이런 숭고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남자가 결혼 전에 얼마나 사랑을 해서 그런 사랑을 하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그 남자와 여자는 일반적인 연애를 해서 결혼한 게 아니고 소개로 만나 인연이 됐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할 수 있지 하고 생각해보면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사랑과는 비교를 할 수는 없지만 인간이 하느님처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인간적인 사랑이 바로 그와 같은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그 남자가 그 세월을 그런 상태의 아내와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때 자신의 그런 운명에 대해 비관적인 생각을 했다면 그런 사랑을 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냥 이 세상에서 그 여자분을 보살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고 그래서 그 현실을 그냥 자포자기하는 심정이 아니라 그저 숙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고 난 후 5년이 지났을 때 처가댁에서 새출발하라고도 했는데 그걸 물리치고 했다는 사실도 한 인간으로서도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지만 그 남자는 평생을 그렇게 살게 될 줄 알았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사례를 보면서 우리가 항상 쉽게 사랑이라는 말을 하긴 하지만 진정 이런 걸 보면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됩니다. 결국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긴 하지만 그 희생조차도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사랑을 줄 수 있다면 그런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게 만약 진정한 사랑이라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빈 강정 같은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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