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아버지의 뜻’은 ‘나의’ 구원과 행복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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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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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07 | 조회수26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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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5-40)”
1) 여기서 “내가 생명의 빵이다.”는, “나 자신이 생명의 빵이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입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을 보았으면서도 왜 나를 믿지 않느냐?” 라고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입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 일들을 보았다면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여러 가지 이유로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하는 자들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요한 6,42).>
2)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또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믿고 회개하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 선포에 응답하는 것은 곧 ‘구원의 길’로 부르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미리 정해 놓은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도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는 것,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나에게 올 것이고”는, “나를 믿고 따를 것이고”입니다. 어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바라고서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께 가는 사람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에서 ‘차별’을 당하거나 ‘누락’되거나 ‘소외’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차별과 소외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시는 일은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모든 사람’을 빠짐없이 구원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뜻이 따로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3)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이란,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에서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면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아버지께서 주신 모든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도록 아들에게 모든 사람에 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2-3).”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지식’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일치, 관계, 사랑’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일치는 세례를 받을 때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일치의 완성’을 향해서, 또는 ‘완전한 일치’를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말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어서 완전한 행복과 기쁨을 누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고 말씀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이 말씀에서, ‘모른다고 하다.’ 라는 말은, ‘관계를 끊다. 일치를 깨뜨리고 떨어져 나가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일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일, 즉 예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일이고, 예수님과의 일치를 깨뜨리고 떨어져 나간 일입니다(마태 26,69-75). 그래서 배반자 유다의 죄만큼이나 큰 죄를 지은 일입니다. 또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한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는 금방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지만, 박해 때에, 또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그렇게 떨어져 나가서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제3주간 수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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