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성소聖召의 여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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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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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5-11 | 조회수28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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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11.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사도13,14.43-52 묵시7,9.14ㄴ-17 요한10,27-30
성소聖召의 여정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
어제는 약속대로 반세기전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이, 지금은 환갑나이의 제자들 여러명이 수도원을 방문하여 작은 동요음악회를 열어줬습니다. 10년째 해마다 5월 어버이날, 스승의 날 가까이 날을 잡아 오는 고마운 제자들입니다. 어제는 스승의 노래, 섬집아기, 어린이날 노래, 과수원길을 정성껏 불러 줬고, 스승의 노래에서는 스승이자 착한목자 예수님을 더 닮아야하겠다는 각오도 새로이 했습니다.
오늘은 계속되는 파스카의 축제 계절, 성모성월 5월에 맞이하는 부활 제4주일이자 성소주일입니다. 예전에는 착한목자 주일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전히 신록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으로 빛나는 축제같은, 우리의 성소를 확인하는 귀한 날입니다. 끊임없는 부르심과 응답의 '성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찾는 열정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우리의 참나의 성소는 퇴색되지 않고 신록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도 주님의 성소자로서 우리의 신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리는 주님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떼라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 주님의 백성이요 주님의 양떼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성소주일이면 생각나는 유다인 랍비 여호수아 헤쉘의 말과 김춘수의 꽃이란 시입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주님께 불림받음으로 비로소 무명과 익명의 존재가 아닌 존재감 충만한 참나를 살게 되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대로 주님께 불림받은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꽃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께 불림받아 사랑받으며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은 인간 누구나의 근원적 갈망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참나의 성소에 우선적으로 확인할 것이 착한목자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시편 고백처럼 우리의 모든 갈망을 충족시켜 주는 착한목자 주님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갈수록 참나를 알아감으로 자존감 높은 참나의 삶입니다. 이런 주님은 나의 운명이자 사랑이 됩니다.
이런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헛것의 유령같은 삶일 수 있습니다. 허무와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삶의 의미이자 중심이신 주님없이 어떻게 거칠고 험한 광야인생을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그러니 우선적인 것이 착한목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따르는 것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이런 착한목자 예수님이 아니고 어디서 이런 목자를 만날 수 있을런지요! 가짜 목자는 얼마나 많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주님이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말씀도 더욱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온 세상, 온 역사의 시간이, 또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수중에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와 하나인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참 자유로운 참 행복한, 참 부유한 삶입니다. 그러니 날로 주님과의 깊어가는 일치의 우정이 제일입니다.
둘째, 제자리, 꽃자리에서 주어진 사명을, 책임을 다하는 삶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참나를 깨닫게 하고 마르지 않는 샘솟는 열정의 삶을 가능하게 합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삶을 보면 그가 얼마나 주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담박들어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의 복음선포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담대한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참 좋은 모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일치의 삶에서 샘솟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복음선포의 사명을 다하다가 박해로 쫓겨나면서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자기 고유의 몫의 사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할 때, 주님은 기쁨과 성령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 주십니다. 막연한 추상적 사랑이나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사명과 책임을 다하는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셋째, 늘 내적 시선은 천상을 향해야 합니다. 지상 순례여정중의 삶임을 한시도 잊어선 안됩니다. 궁극의 희망을 천상에 둘 때 결코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탐욕의 유혹이나 수렁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상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초연한 이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삶을, 존엄한 품위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음도 천상에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가능합니다. 바로 제2독서 묵시록에서 천상 성인들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런 천상 현실에 내 희망의 닻을 내릴 때 주님의 전사로서 백절불굴, 천하무적,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 묘사하는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천상성인들은 어떤 분입니까? 다음 말씀 꼭 마음에 담아 두시기 바랍니다.
“저 분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분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되었다.”
결코 온실같은 안락한 세상을 살았던 분들이 아니라, 크고 작은 무수한 고난을 겪어 낸, 순교적 삶에 항구했던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분발케하는 성인들입니다. 위 말씀에 근거한 다음 11월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저녁성무일도시 마리아의 노래 후렴은 제가 자주 즐겨 노래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우리는 모두 주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입니다. 참으로 각자 주님께 불림받은 삶의 자리에서 제몫의 사명과 책임에 최선을 다할 때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존엄한 품위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천상에 희망을 두고 성소의 여정에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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