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과 일치의 여정 “아무것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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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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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7:29 | 조회수24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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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17.부활 제4주간 토요일
사도13,44-52 요한14,7-14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과 일치의 여정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3)
주차장 주위, 때되어 만개하기 시작한 이팝나무꽃들이 장관입니다. 비개인후 새벽 맑은 밤하늘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달과 샛별입니다. 아주 예전 임향한 그리움을 표현한 "별"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1997.4. >
삶은 여정입니다. 모두가 예외없이 '언제나 길위의 존재들'(being always on the way)입니다. 길에서 태어나 길위를 걷다가 길위에서 죽습니다. 이런 도상의 여정에서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길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늘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고양 국제 꽃 박람회”에서 70대 중반을 넘어선 사촌형제들과의 만남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번은 뜻밖에도 약속이나 한 듯이 부부동반해서 나타났습니다. 이제 완연한 노부부들의 모습이었고 사촌 형제들 모두가 소리없이 늙은 아내를 지극히 섬기는 모습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제 일간지에서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라는 긴 시를 읽었습니다. 중간 부분만 생략하고 인용합니다.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곱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 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이 시에 대한 평자 박준 시인의 다음 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침묵의 사랑도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혼자의 시간을 견디고 견디며 고요를 마주해야 합니다. 떠나는 일보다 머무는 일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균열을 도드라지기 하는 것은 대화입니다. 주고 받을 다정한 말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서로 딛고 있는 다정한 침묵의 시간이 앙상해 질 때 사랑은 종말의 순간을 가까이 불러들입니다.”
아주 오래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제 물음에 “그냥 살면 돼.”라 답을 주신, 지금은 고인이 된 옛 장상도 생각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삶의 이치는 노부부든 노수도자든 똑같습니다. 최선을 다해 서로 늙어가는 일입니다. 노수도자는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또 수도형제들과 함께, 사랑한다는 말이나 확인없이 최선을 다해 살아갑니다.
처음 때부터 모임에 참석하는 미국에 사는 사촌 제수씨는 그때 마다 정성이 담긴 촌지를 주는 데, 아마도 평생 독신의 수도사제로 사는 제가 애틋한 마음에서 일 거라 추측이 되고 저는 가정미사를 봉헌해 드립니다.
삶은 여정입니다. 청춘으로 시작했던 도반 수도자들도 70대 중반 전후가 되니 완연한 노인의 모습들입니다. 모두가 나이가 더해 갈수록 서로, 또 주님께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들이 참 아름답고 거룩해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의 예수님 제자들은 너무 젊었습니다. 필립보와 예수님이 주고받는 대화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러나 젊은 필립보의 열정과 솔직함이 좋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하느냐?”
그대로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평생 정주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성 베네딕도가 누누이 강조하는 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시종여일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에 전념하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필립보는 주님 말씀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며 이후 주님과 사랑과 우정의 일치의 여정에 한결같이, 끝까지 정성과 사랑을 다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순교로서 입증되는 일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다음 말씀도 주님과 일치의 여정에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겠다는 격려와 자극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과 일치의 믿음의 여정에서 우리의 바램은 그대로 주님의 바램과 하나가 될 것이고 그대로 응답될 것이라는 주님 약속의 말씀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보다시피 이미 이런 성숙된 일치의 경지에 이른 바오로와 바르나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절정에 이른 제자들은 복음의 필립보와 달리 그대로 아버지의 얼굴을 뵙듯이 주님을 뵙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들의 백절불굴의 자세와 다음 담대한 선언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성령따라 자유롭게 신바람나게 복음 선포의 활동에 매진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요, 이들 제자들은 유다인들에게 쫓겨 가면서도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합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계속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를 날로 깊게 해 주시며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나를 기쁘게 하시니, 손수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5).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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