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수행들 “올바른 자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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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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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18 | 조회수121 | 추천수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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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8.연중 제11주간 수요일
2코린9,6ㄴ-11 마태6,1-6.16-18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수행들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시편112,1)
참된 수행생활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생각이나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수행자로 사는 일이 으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겸손하고 부지런한 수행자로 사는 것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참된 영성을 살려는 믿는 모두에게 해당되는 일입니다. 예나 이제나 특히 요즘 부각되는 수도생활에 문제점 셋이 수행, 사람, 돈이요 우선순위의 으뜸은 수행입니다.
아무리 전통좋고, 자연환경좋고, 건물좋은 수도원도 그 안에 참된 수행자라는 보물이 없으면 다 쓸모없습니다. 수도자답게 사는 올바른 수행의 참 좋은 수행자들이 있을 때, 성소자 사람도 줄을 잇고, 돈도 따릅니다. 그러나 우선순위로 하면 참된 수행자들의 공동생활이요, 사람, 돈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고 따르는 수도자다운 본질적 삶에 충실할 때 성소자도, 돈도 자연스럽게 따르기 마련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아름답다”라는 시집이 눈에 띕니다. “살아 있는 것만 꿈꾼다”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진정 진선미(眞善美) 하느님을, 하늘나라를 꿈꿀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고 또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하느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옛 현자 <다산>의 가르침도 수행생활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삶의 격을 높이는 것은 지위나 신분이 아니라, ‘부지런함’이다.” “어찌하면 뭉툭한 것을 뚫을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막힌 것을 트이게 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어찌하면 거친 것을 연마할 수 있는지 묻자 부지런하라 하셨다.”
분명 노력하는 천재, 수행자 다산의 체험을 반영한다 싶습니다. 예외없이 일가를 이룬 분들은 노력하는 천재들임을 봅니다. 어제 하느님의 진짜 농부 어느 자매님이 탐스런 무들을 농기계로 옮기며 환히 웃는 사진이 너무 건강하고 아름답고 감동스러워 보낸 카톡 메시지와 자매의 답글을 나눕니다. 말그대로 세상 속의 수행자 자매입니다.
“참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주님의 여전사! 사랑하는 자매님 위해 생미사 봉헌합니다. 하느님의 진짜 농부, 자매님, 파이팅!” “아부지...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찬미영광 영원히 홀로 받으소서. 신부님, 감사합니다.”
아, 그렇습니다. 모든 수행들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런 순수한 하느님 사랑에서 샘솟는 열정의 수행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농사를 사랑하는, 일상의 삶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농부 자매입니다. 절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라는 옛 애송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자주 인용해도 늘 좋고 새롭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27년전 성탄절에 어느 수녀님으로부터 빨간 칸나 꽃을 선물받고 불현듯 떠오른 시의 추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수행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세 수행들, 올바른 자선, 올바른 기도, 올바른 단식에 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비단 세 수행뿐 아니라 참되고 올바른 겸손한 수행들을 통해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습니다.
참된 관상가, 참된 신비가, 참된 영성가로 살아야 하는 우리 수행자들입니다. 바로 하느님을 사랑하듯 자선을, 기도를, 단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순결을, 공부를, 침묵을, 노동을, 겸손을, 모든 수행을, 자연을, 일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사랑의 수행이 우리를 순수하게 하고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자유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섬김의 활동을 목적으로 합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의 리더십이 진짜입니다.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뿐입니다. 이제 복음의 섬김은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보편적 덕목이 되었습니다. 어제 읽은 글도 좋아 나눕니다.
“권력은 봉사다. 우리가 카르텔 정권에서 잃어버린 가장 근본적인 정치언어는 바로 공복(公僕)이라는 단어다. 공직자는 국민의 종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저 관료주의적 구호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원초적 계약이다.”
하느님 중심의 참된 수행자는 하느님의 충복(忠僕)도 됩니다. 충견(忠犬)만도 못한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사람 중심의 위선적이고 과시적인 허영이 말끔히 사라진,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 참 아름답고 겸손하며 이런 관상의 숨겨진 삶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참되고 겸손한, 아름다운 수행의 원리입니다. 예전 불가의 대선사 성철 스님이 탄복한 구절들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자신에 마음을 활짝 열어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하느님 중심의 철석같은 믿음이요 사랑의 수행들입니다. 이런 수행을 통해 외적, 물적인 것으로부터 집착에서의 이탈로 날로 초연한 자유와 더불어 깊어지는 주님과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바오로 사도는 성서를 근거로 자발적인 사랑의 자선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참 좋은 가르침을 주십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 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라는 성경의 기록도 있습니다.”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레오 교황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역시 각별합니다. 교황의 “하느님이 듣지 못하는 부르짖음은 없다(There is no cry God does not hear)”, “주교들은 가난한 이들로부터 시선을 돌려서는 안된다(Bishops must not turn gaze from the poor)”라는 강론 대목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발적 사랑의 참된 자선은 그대로 하느님 찬미가 되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첩경의 지름길이 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참된 수행자로 살아가는데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올곧은 이들에게는 어둠 속에서 빛이 솟으리라. 그 빛은 너그럽고 자비로우며 의롭다네.”(시편112,4).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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