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눈빛이 이런 사람은 조심해야!> 복음: 마태오 6,19-23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보물을 세상에 쌓는 사람의 눈은 맑지 못하게 되고 탁한 어둠처럼 된다고 하십니다. 눈이 맑고 밝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언제 그런 순수한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눈도 성숙해간다고 생각합니다. 익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세상 것을 바랄 수도 있고 어떤 때는 천상 것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결단이 어느 것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분명 조금씩 맑아질 수도 있고 탁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른들이야 잘 눈치채지 못할 수 있지만, 아이들이나 동물들은 그 눈빛을 쉽게 알아챕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대해 집중하기에 상대가 자신을 해칠 사람인지, 생명을 주는 사람인지 알아내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때는 아이들이 저를 한눈에 좋아해 주고 어떤 때는 무서워하기도 하는 것을 볼 때 제가 어떤 눈빛인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결단’입니다. 아마도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오스카 쉰들러가 바로 그 극적인 전환을 보여주는 최고의 예일 것입니다. 탐욕과 기회주의로 가득했던 그의 눈은, 유다인 마을을 짓밟는 학살의 현장에서 길을 잃은 ‘붉은 옷의 소녀’를 목격하는 순간,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수천의 흑백의 죽음 속에서, 그 작은 생명의 선명한 붉은색은 그의 양심을 꿰뚫는 은총의 빛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숫자’와 ‘비용’으로만 보이던 유다인들이, 그 순간부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가진, 구해야만 하는 ‘생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연민의 시선 하나가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는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눈만 보고 그 사람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눈이 세상 것 때문에 빛날 수도 있는데, 그때 빛나고 있는 것으로 그 마음도 환하게 빛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 것 때문에 빛나는 그 눈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분명 예수님을 팔아넘길 때 은전 30냥을 보고는 눈이 빛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예수님을 팔아넘길 생각으로 골몰하여 눈이 흐려졌을 것입니다. 반면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항상 눈이 맑습니다. 무언가를 바랄 때 눈은 빛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은 어떻습니까?(사도 9,1-19)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눈을 멀게 하는 강렬한 빛을 만납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교만으로 가득 찬 육신의 눈을 잠시 멀게 하심으로써,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니아스가 그에게 안수했을 때, “무엇인가 비늘 같은 것이 그의 눈에서 떨어져” 나가며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눈빛은 증오와 살의가 아닌,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사도의 빛으로 타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 빛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사랑이나 사람의 영혼을 위한 목적으로 산다면 그 사람의 눈은 항상 그 기회를 찾기 때문에 흐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눈을 밝게 하는 에너지가 오래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그것을 얻지 못한 불만으로 어둡게 됩니다. 그러니까 눈은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욕망으로 빛이 납니다. 성경은 이러한 ‘시선의 변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세관장 자캐오를 떠올려 보십시오(루카 19,1-10). 그의 눈은 오직 돈을 향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도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는 데에만 혈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계속 행복할 수가 없으니 이런저런 행복을 찾기 위해 어떤 때는 빛나고 대부분의 시간은 우울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가 누구신지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올려다보시며’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그를 죄인이 아닌 한 인격체로 바라봐 주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맑은 눈빛과 마주쳤을 때, 자캐오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의 재산 목록에서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향했고,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라는 기쁨의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님의 ‘성한 눈’이 자캐오의 ‘나쁜 눈’을 치유한 것입니다. 자캐오는 이제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며 항상 그 맑은 눈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우리 눈은 하늘의 것을 추구하면 그 ‘의지’가 대부분 그 눈을 맑게 해 줍니다. 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가끔은 빛났던 눈이 대부분은 다른 빛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질서 있는 삶이 필요합니다. 세상 것을 추구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질서가 무너지면 눈도 무너집니다. 그러니 눈빛이 자주 바뀌는 사람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 사람은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에 대한 ‘결단과 의지’가 나의 눈도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우리도 나이가 들면서 엄마만 바라보겠다는 아이의 맑은 눈을 닮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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