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남의 작은 티끌보다 자신의 큰 들보를 /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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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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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6-22 | 조회수87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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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심판받고, 되질하는 그 되로 되받는다. 너는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의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 눈의 티를 빼내겠다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의 들보부터 빼라. 그래야 뚜렷이 보고 형제에게서 티를 빼낼게다.”‘ 건물을 지을 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 바닥이나 천장에 대는 지지대를 ‘들보’라 한다. 금방 눈에 뜨인다. 하지만 티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남 눈의 티끌’은 쉽게 찾는다. 그러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못 본다. 어떤 이가 ‘눈 속에 들보’가 있는 이일까? 남을 심판하는 이란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을 것이다.” 라고 예수님은 일침을 주셨다. 이렇게 타인을 심판하기는 쉽다. 정작 본인이 없는 곳에서, 그의 허물을 말하기는 누워 떡 먹기다. 이는 순간적으로 방심하면 누구나 무턱대고 하는 실수다. 대부분은 자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자기를 싫어하는 이들보다 많을 거라 생각한단다. 그러나 실제는 그 반대일 수도. 자기를 아는 이 중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이가, 긍정인보다 많다는 뜻이리라. 이게 생각과 현실이 다르다는 한 예이다. 또 남이 자기를 보는 시각과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 시각이 실상 ’다르리라는 뜻‘일 게다. 사실 남의 단점과 약점을 바라보기는 쉬워도,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남 비판하는 데는 익숙하면서도, 정녕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판단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기만과 가식의 가면을 벗으라는 거다. 남에게는 살쾡이 눈을 가졌고, 자신에게는 두더지 같은 눈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 있다. 이는 아픈 지적이지만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자신의 본 모습 정직하게 바라보는 데 눈이 먼 이가 바로 나이기에. 그러기에 멀리 있는 이, 탓할 그 마음은 꼭 저버린다. 그렇지만 매일 만나는 이를 곧잘 탓한다. 모르는 이는 심판하지도 않는다. 잘 아는 이만 딱 골라 심판해 된다. 물론 서먹한 이도 공격하지 않는다. 친한 이 만을 막 쏘아대며 몰아붙인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사랑하는 이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 사랑이 완성되리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 눈으로 보는 것 같지만 평생 못 보는 얼굴 하나는 꼭 가졌다나. 늘 함께 있지만 오로지 거울을 통해서만 보는 바로 자신의 얼굴이다. 다른 이의 얼굴은 이리저리 직접 살피지만, 자신은 어딘가에 비추어야만 볼 수가 있을 게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말씀대로 형제의 눈에 든 작은 티는 잘 보면서, 자신 눈 속의 그 큰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눈을 가진 덕에 주위를 잘 볼 본다. 하지만 눈을 가졌다 해서 모두가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과 보고 싶은 것이 다르듯이, 무엇을 보느냐는 마음의 눈에 달려 있다. 내 이웃의 잘못은 내 마음을 불편하기에 쉽게 보일 게다. 하지만 내 허물만은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길 꺼린다. 남의 험담은 쉽지만, 자신에 대한 것은 생각하는 것조차 받아들이기가 불편하기에. 그래서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는 예수님 말씀은 누구나 한 번쯤은 꼭 새겨봐야 할 말씀이다.
연중 제12주간 월요일(마태 7,1-5) https://blog.naver.com/bigllightqa/22390809570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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