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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성화의 여정 “두려워하지 마라”
작성자선우경 쪽지 캡슐 작성일07:43 조회수47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5.7.12.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창세49,29-31.33;50,15-26ㄱ 마태10,24-33

 

 

성화의 여정

“두려워하지 마라”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시편69,33)

 

오늘 화답송 후렴입니다. 가난한 영혼들이 찾을 바 하느님이요 하느님을 찾아 만날 때 마음도 새롭게 살아 납니다. 어제는 제 사제서품 36주년(1989.7.11.)이 되는 날이었고, 오늘은 바오로 수사 선종 5주기(2020.7.12.)가 되는 날입니다. 

 

돌아가시기 2주전 영명축일날, “나는 팔팔하다!”며 건강을 과시하던 88세 바오로 수사님이었습니다. 사제서품후 주변에서 참 많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책상위 사제서품식때 사진에서 젊고 건강해 보이던 어머니와 세 형님들도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래입니다. 주변에서도 끊임없이 세상을 떠나 사라져 갑니다. 지금쯤 어디서 어떻게 계실까 생각해 봅니다.

 

어제는 문득 매일 쓰는 강론이 유언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유서遺書를 쓰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태양이 떠오르며 하루가 열리듯 강론 태양이 떠올라야 비로소 하루가 열리는 느낌입니다. 저에겐 특히 그러합니다.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면 하루가 반은 지난 듯 합니다. 교황청 홈페이지에서 교황의 두 언급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희망은 기쁨의 원천이다.”

(Hope is source of joy no matter our age)

‘행복하여라,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집회14,2)말씀을 주제로 한 제5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 담화문중 교황님 말씀입니다.

“생태적 위기는 관상적 시선을 요구한다.”

(Ecological crisis requires contemplative gaze)

휴가에 앞서 미사중 강론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영문을 병기하니 더 실감있게 와닿습니다. 자본주의 세상에 기후위기, AI시대로 세상이 피폐해질수록 관상적 시각, 관상적 삶은 더욱 절실해 집니다. 세상 무대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라지고 새 교황 레오14세가 매끄럽게 바톤을 텃치하여 임무를 잘 수행하고 계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무수히 죽어 사라지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하늘은 푸르고 강물은 흐르고 사람들은 살아 움직입니다. 흡사 바람처럼, 구름처럼 흔적없이, 자취없이 죽어 사라지는 사람들이요 서서히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갑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는 끝납니다. 그동안 참 많은 분들이 인생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 창세기는 야곱이 긴 축복후(49장) 편안한 죽음이 소개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요셉이 유언후 죽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준비된 자연스런 죽음입니다. 사실 우리 많은 옛 어른들도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편안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형들을 안심시키는 요셉의 신앙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이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아, 요셉의 선종의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하느님을 늘 경외하고 두려워하여 철석같이 믿었기에 세상에 대한, 심지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옛 어른들은 오늘날 사람들처럼 크게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삶에 집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거의 대부분 모두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살것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합니다. 두려움없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합니다. 남의 죽음이지 나의 죽음은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합니다. 이래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생생한 교훈이 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삶은 우연한 노화의 여정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성화의 여정입니다. 

 

제가 늘 즐겨 드는 예는 일일일생, 내 삶의 여정을 하루로, 또 일년사계로 압축해 보는 것입니다.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지 확인 점검한다면, 하루하루 선물같은 날에 감사하며 환상이나 탐욕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것이며 복된 선종도 가능하리라는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두려워하지 마라'는 내용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습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합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게 마련입니다. 주님이자 스승을 삶의 모범으로 삼을 때, 모든 것은 주님 앞에서 투명히 드러남을 깨달을 때, 두려움 역시 사라집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증언하면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할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증언하면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증언할 것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의 명강론이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일어나는 일이 모두 하느님의 뜻은 아니어도 결코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허락없이는 나뭇잎 하나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입니다. 세상 그 누구, 그 무엇도 영혼은 다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육신도 영혼도 멸망시킬수 있는 분,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 그 무엇도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내 육신은 물론 영혼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죽음은 하느님을 모르는 영혼의 죽음이며 이를 두려워한다면 하느님을 경외하며 믿는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우리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 가능한 순교의 죽음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영혼을 소홀히 방치하여 잃어버림으로 자초하는 심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말 돌봐야 할 것은 육신의 건강보다 영혼의 건강입니다. 주님을 경외하여 사랑하고 신뢰할 때 날로 튼튼해지는 영혼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믿음을 견고히 하고 영혼을 튼튼히 하여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거룩하신 그 이름을 자랑하여라.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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