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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영원한 생명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작성자선우경 쪽지 캡슐 작성일2025-07-13 조회수48 추천수4 반대(0) 신고

2025.7.13.연중 제15주일                                             

 

신명30,10-14 콜로1,15-20 루카10,25-37

 

 

영원한 생명

“예수님을 배우십시오”

 

 

오늘과 똑같은 연중 다해 15주일 강론을 1989년 7월16일 사제서품후 첫미사때 제가 직접 신림동 성당에서 했습니다. 36년전 41세때 강론이지만 지금도 감동이 새롭습니다. 이때 강론 제목은 “사람이 되는 길”이었고 강론 끝무렵에는 “사람이 됩시다”라는 다음 김준태 시인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땅 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눈이 내리면

 하늘을 보면서 삽시다.

 비가 내리면

 땅바닥을 보면서 삽시다.

 

 하늘과 땅바닥을 보지 않으면

 날마다 보지 않고 살아가면

 사람 몸뚱이는 총알이 돼 버립니다.

 사람 몸뚱이는 짐승이 돼 버립니다.

 

 두 눈에 하늘을 넣지 않고

 가슴에 풀꽃 향기를 넣지 않으면

 사람 목숨에도 늑대의 피가 흐르기 마련입니다.

 

 아, 이제 제발!

 사람을 보면서 사람이 됩시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간현실입니다. 아, 정말 하늘을 보면서 하느님을, 땅을 보면서 목숨 받아 함께 사는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이 됩시다. 얼마전 레오 교황은 오늘 복음을 소재로 한 강론에서 “신자가 되기에 앞서 우리는 사람이 되도록 불림받았다”고 핵심을 짚었습니다. 또 교황님은 “생태적 위기는 관상적 시선을 요구한다”며 실용에 앞서 관상적 삶에 강조를 두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은 우리가 누군지 비춰주는 거울같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사제? 레위인? 강도만나 초주검이 된 이? 착한 사마리아인?” 저절로 묻게 됩니다. 율법학자의 물음은 예전 사막의 스승을 찾았던 구도자들의 공통적 질문이었습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의 공통적 관심사는 다 하나 “참으로 진짜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본질적 질문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갈망에서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물음을 보면서 속으로 웃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이런 질문을 했으니 말입니다. 답은 하나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사람됨의 시험에 합격한 이교인 착한 사마리아인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 말고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님의 넓고 깊은 관상적 시야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실천적으로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제2독서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고백인 '그리스도 찬가'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시야를 지니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고무합니다. 바로 우리가 매주 수요일 저녁 성무일도때 마다 바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자랑스럽게도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속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전 우주와 인류역사의 처음이자 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모시는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이 맏이이십니다.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고,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이런 깊고 넓은 관상적 시야만이 생태적 위기에 처한 공동의 집 지구를 구원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관상적 시야를 키워주고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관상적 삶을 살게 합니다. 이래야 오늘 복음의 사제나 레위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흔쾌하게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화해시켰습니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그리스도 예수님이신지요! 

 

바로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의 관상적 시야를 지니고 화해의 사람, 평화의 사람으로 진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또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알게 됨으로 고귀하고 존엄한 품위의 인간으로 살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런 축복인지 감격하게 됩니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세가 제1독서 신명기에서 명쾌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는 주님의 계명은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요 하늘에 있지도 않고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습니다. 사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입과 우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핑계대거나 변명할 수 없습니다. 이런 감격을 노래한 고백이 생각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말씀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까이 선물처럼 주어진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이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입니다. 바로 사랑의 이중계명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경천애인의 화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보고 배워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를 정확하게 대답한 율법학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셋째,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는 것입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내 중심의 관점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  이웃 중심의 관점으로의 전환입니다. 이야말로 진짜 회개입니다. 고통에는, 정의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참으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곤궁중에 있는 이들의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수난당한 초주검이 된 이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일 수 있습니다. 또 이를 도와 살려준 자비로운 사마리아인 역시 익명의 예수님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맡은 종교적 책임과 율법 세부 규정을 준수한 사제와 레위인은 곤궁중에 있는 이를 외면한채 떠납니다. 분별의 잣대는 주님의 자비임을 몰랐습니다. 주님과 율법학자간 주고 받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정말 사람됨의 시험에 합격하여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은 이는 자비를 베푼 이교인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셋 중 어디에 해당되는지요? 어제 읽은 단테 <신곡>의 지옥편에 나오는 비열한 천사들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을 배반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충실한 것도 아닌

 오직 자기만을 위한 저 비열한 천사의 무리들”

 

자기도취의 착각에서 벗어나,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자신에게 진실하고 이웃에게 거짓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곤궁중에 있는 이들의 자비로운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 좋은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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