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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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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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08:26 | 조회수24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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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간 월요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 마태 14,13-21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세상에는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며칠 동안이나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해 병들고 굶어죽기까지 하는 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계시다면 어떻게 저들이 저런 고통을 겪으며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시느냐고,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사랑 넘치시는 분이라면 우리에게서 고통을 없애주시고 죽음을 겪지 않도록 보호해주셔야 하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정말 ‘하느님 탓’일까요? 하느님은 세상을 당신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창조하시고 나서, 우리에게 당신 뜻에 맞게 잘 다스리라고 맡기셨습니다. 즉 이 세상에 있는 재화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할지는 우리 ‘손’에 달린 겁니다. 그런데 나는 탐욕과 집착으로 필요 이상의 재물을 잔뜩 움켜쥐고 있으면서, 내 이웃이 겪는 빈곤과 고통을 보고도 나몰라라 하고 있으면서, 왜 그들을 보살펴주시지 않느냐며 하느님께 책임을 돌릴까요? 하느님 탓을 하며 책임을 회피하기보다, 내가 하느님께 받은 탈렌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것을, 그분 뜻에 따라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그런 점을 상기시키시고자,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직접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며 볼멘 소리를 하지요. 양이 적지만 분명히 음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밖에 없다”며 자신들이 가진 게 없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라는 척박한 땅에서 빵과 물고기를 먹게 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식 자체의 가치보다 그 ‘수량’에만 집착하며 양이 적은 것은 하찮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처럼 자신에게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만 쳐다보고 있으면 만족과 감사를 통해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늘리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 자신보다 더 곤궁한 이를 보살피고 돌볼 여유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제자들과 다릅니다. 그분은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 그 음식의 양보다 그것이 지닌 ‘가치’를 바라보시며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그랬기에 자신들에게 부족하고 모자란 것만 보았던 제자들과 달리, 당신이 가진 것을 하느님 아버지께서 좋은 뜻을 이루시는데에 잘 쓰시도록 기꺼이 봉헌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는 빵이 몇 개인지, 물고기가 몇 마리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베풀어주신 하느님의 뜻이 중요할 뿐이었지요. 그리고 우리에게 행동과 결과로 보여주십니다. 적은 양의 음식으로 수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은 논리적 계산이 아니라 감사와 봉헌에서 시작되었음을. 지금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얼마만큼 가졌든, 그건 원래부터 내 소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때,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하느님 앞에 내어놓을 때 우리를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하게 채워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이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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