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21주일 <좁은 문: 사랑 때문에 고생을 선택하는 삶> 복음: 루카 13,22-30 
LORENZETTI, Pietro 작, (1325) |
+찬미 예수님! 요즘 해리 장애를 앓고 있는 이유엽 (그리고 강순) 씨의 이야기가 인터넷에 많이 뜹니다. 이유엽 씨의 이야기는 단순히 여장하는 남자의 이야기가 아닌, 깊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온전한 모습을 되찾으려는 한 인간의 처절한 여정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그의 첫 번째 모습은 30년 경력의 45세 베테랑 보디빌더 이유엽입니다. 헬스장에서 그는 누구보다 진지한 표정으로 엄청난 무게의 역기를 들어 올립니다. 그의 몸은 오랜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 갑옷으로 덮여 있습니다. 그는 과묵하고, 강인하며, 스스로를 통제하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인물로 비칩니다. 이 근육질의 몸은 세상의 편견과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또 다른 인격, ‘강순’이라는 30대 여성이 살고 있습니다. 강순은 애교가 많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며, 예쁘게 꾸미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밝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나타날 때면 이유엽 씨의 강인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줍은 미소와 여성스러운 말투가 드러납니다. 그녀는 이유엽 씨의 옷장 한편에 고이 간직된 긴 머리 가발과 화려한 원피스, 하이힐을 신고 세상에 나옵니다. 이 두 인격이 한 몸에 살게 된 이유는 그의 끔찍했던 어린 시절의 상처 때문이었습니다. 유엽 씨는 지독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였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셋방살이를 했는데, 주인 남자가 유엽을 상습적으로 폭행과 추행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습니다. 사춘기 전까지 유엽은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영혼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인격, ‘강순’을 만들어냈습니다. 강순은 유엽이 감당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슬픔, 공포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태어난 보호 인격이었습니다. 유엽이 근육으로 자기 몸을 지키는 ‘외부의 갑옷’을 만들었다면, 강순은 그의 여린 영혼이 부서지지 않도록 끌어안는 ‘내면의 보호막’이었던 셈입니다. 처음엔 강순이 자신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휴가 후 군대에 복귀할 때 갑자기 강순이 나타나 하루 늦게 복귀하여 영창에 가야 했습니다. 아마 스트레스가 극심해지면 회피 성향으로 강순이 나타났던 것 같습니다. 핸드폰에는 전혀 다른 인격의 얼굴이 녹화되어 있었고, 그것을 본 유엽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고통의 시간 끝에, 그는 마침내 강순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가 자신의 여성 인격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단순히 여장을 하고 싶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일부를 온전히 인정하고 세상에 드러내려는 용기 있는 고백이었습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출연한 그는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이렇게 직접 표현했습니다. “38년 동안 (강순을) 누르면서 살았어요. 병원에도 오래 있었고요. 약도 오래 먹었고… 그런데 이게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그냥 받아들이고, 같이 그냥… 공존하면서 살고 싶은 거죠.” 서장훈 씨가 “여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거죠?”라고 묻자, 그는 더욱 근본적인 자신의 내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여장을 하고 싶다는 그 표현보다는… 그냥 제 안에 여자가 살고 있다는 걸… 좀 보여주고 싶어요. 그냥… 저도 이제는 (강순의 모습을) 끄집어내서, 같이 좀 살고 싶어요. 이제는…” 이 말속에는 ‘여장 남자’라는 세상의 편견을 넘어, 자신의 가장 깊은 상처이자 분신인 ‘강순’을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고, 그녀의 삶 또한 지켜주고 싶다는 그의 눈물겨운 다짐이 담겨 있습니다. 그의 소망은 더 이상 숨지 않고, ‘이유엽’과 ‘강순’이라는 두 모습 모두가 자신임을 인정하며 온전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는 지금 여성 호르몬을 맞으며 여성으로의 성전환 수술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슴을 만들고 얼굴도 여성스럽게 수술할 생각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가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쌍둥이 아들이 있고 이 모든 것을 다 받아주는 아내도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라고 충고하고 싶습니까? ‘그래, 그 동안 네가 힘들 때 네 친구가 되어주었던 강순을 살게 해라. 이제는.’ 그러면 아이들은 어떻게 됩니까? 여성처럼 가슴이 있고 여성의 얼굴과 목소리를 내는 아빠를 갖는다는 것은 실로 아이들 삶에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유엽 씨가 남편과 아버지라는 현실의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45세까지 저런 근육을 키워왔다면 그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젠 한계에 부딪힌 것입니다. 마치 휴가 나왔다가 다시 군대로 복귀해야 하는 그날처럼,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가야 할 때마다 도피처가 되어주었던 것이 바로 강순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살려면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좁은 문이 명확히 무엇인지는 밝혀주지 않습니다. 다만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루카 13,27)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이 어떤 의미인지가 핵심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불의(ἀδικία, 아디키아)’는 단순히 나쁜 짓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내가 받은 것에 합당하게 돌려주지 않는 것이 바로 불의입니다. 좁은 문이란 바로 이 ‘정의’와 관련됩니다. 내가 남편이고 아버지라는 이름을 받았다면, 그 이름에 합당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 정의입니다. 강순으로 회피하는 것은,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정의를 저버리는 ‘불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좁은 문은, 사랑을 위해,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는 정의를 위해, 이전의 나를 죽이는 고생을 기꺼이 선택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자기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라’는 뜻의 ‘여기당(如己堂)’이라 불리는 작은 집이 있습니다. 이 집의 주인은 방사선과 의사였던 나가이 다카시 박사입니다. 그는 방사선 연구의 후유증으로 백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 자신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잿더미 위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던 그에게 남은 것은 어린 두 자녀뿐이었습니다. 그는 절망 속에서 도망칠 수도,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라는 자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병든 몸을 이끌고 무너진 성당 터에 두 평짜리 작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 누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끔찍한 고통과 슬픔을,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로 바꾸어냈습니다. 그의 책들은 전쟁으로 상처 입은 수많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위로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 남편, 병든 환자로서의 고통을 회피하는 대신, 아버지이자 의사, 작가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좁은 문’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버지가 선택해야 할 좁은 문이 있다면, 아들이 감당해야 할 좁은 문도 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최대 1m밖에 안 되는 희소병을 안고 태어난 대성이의 삶이 그렇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지만, 그의 몸은 10kg을 넘지 못하고, 작은 손가락과 팔은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습니다. 아빠가 미안한 마음에 ‘대성아, 몸이 작아서 불편하지 않니?’ 하고 물으면, 아이는 오히려 아빠를 위로합니다. “아빠, 어쩔 수 없는 거지. 슬퍼하지 마, 걱정하지 마!” 자신 탓인 것 같다며 눈물짓는 엄마에게는 “엄마, 나 혼자 할 수 있어!”라고 외치며, 불편한 손으로 어떻게든 자신의 일을 해내려 애씁니다. 대성이가 자신의 불편한 몸으로 부모님을 위로하고 동생을 배려하는 그 모든 순간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불평할 이유가 세상 누구보다 많지만, 그는 아들이라는 자신의 자리에서 사랑으로 보답하는 ‘좁은 문’을 기꺼이 선택한 것입니다. 나가이 다카시 박사와 어린 대성이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원망하며 넓은 길로 도망치는 대신, 아버지로서 혹은 아들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좁은 문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 기꺼이 조금 더 고생하는 삶을 살아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들에게 빛이 되었습니다. 1995년 르완다 내전 당시,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키베호의 한 기숙학교를 습격했습니다. 그들은 학생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후투족은 이쪽, 투치족은 저쪽으로 갈라져라!”고 소리쳤습니다. 투치족을 골라내 학살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열일곱 살의 한 소녀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기에는 후투족도 투치족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매입니다.” 그녀의 외침에 모든 학생이 서로의 손을 잡고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학살자들은 그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고, 수많은 소녀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소녀들은 ‘나만 살겠다’는 넓은 문을 거부하고,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가장 좁고도 가장 영광스러운 문을 선택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공동체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르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때, ‘너는 너, 나는 나’라고 선을 긋는 넓은 길을 피하도록 노력해 봅시다. 대신, 키베호의 소녀들처럼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고 마음속으로 되뇌며, 그를 위해 아주 짧은 화살기도라도 바쳐주는 것입니다. 이 작은 고생의 선택이 바로 오늘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