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는 질문: “그러면 누가 좋은 건데?”> 복음: 마태오 23,13-22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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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저희 본당 조원동 주교좌성당이 설립된 지 50주년이 되는 매우 뜻깊은 해입니다. 50주년을 맞아 저는 오랫동안 한 가지를 두고 갈등하고 있습니다. 바로 본당의 ‘장궤틀’을 교체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장궤틀은 30년이 넘어 낡았습니다. 여전히 쓸 수는 있지만, 솔직히 주교좌성당의 위상에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50주년이라는 역사적인 시점에, 성전의 모습을 일신하고 신자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기도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제가 주임으로 있는 동안 무언가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는 흔적을 남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저 장궤틀은 전삼용 신부 때 바꾼 거야.’ 이런 말을 듣고 싶은 욕심이 왜 없겠습니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직 쓸 수 있는 것을 굳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바꾸는 것이 과연 주님의 뜻일까?’, ‘이것이 정말 신자들을 위한 일일까, 아니면 나의 만족과 명예를 위한 일일까?’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갈림길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해야 할까요? 바로 이 질문이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해야 할 강론의 주제입니다. ‘뭣이 중한지’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라고 강하게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멀어,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였을까요? 그들은 세속-육신-마귀, 즉 ‘자아의 욕망’에 사로잡혀 오로지 ‘자기 좋은 것’만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개종자 하나를 얻기 위해 세상 끝까지 갈 정도로 열심했지만, 그 동기는 하느님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 편을 하나 더 만들었다’는 자신들의 세력 과시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어겨도 되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성전보다, 자신들의 배를 불릴 수 있는 금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과 이웃의 마음은 보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지위와 이익, 명예만이 보였습니다. 영화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가 바로 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는 기차 안에서 살아남아 앞 칸으로 가겠다는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창밖 세상의 눈이 녹고 있다는 ‘새로운 생명의 신호’를 보지 못했습니다. 반면, 남궁민수는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존보다 딸의 미래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진짜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는 ‘사랑의 욕구’가 있었기에, 그의 눈은 기차 밖을 향할 수 있었고, 마침내 ‘뭣이 중한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커티스처럼 욕망의 기차를 폭주하는 우리가 어떻게 멈춰 설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신호등’이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빨간불을 무시하고 달리고 있는지, 파란불에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알려주는 외부의 신호 말입니다. 2012년 침몰한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스케티노 선장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는 4천 명이 넘는 승객들을 배에 남겨두고 자신 먼저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자신의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선장으로서 ‘뭣이 중한지’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바로 그때, 이탈리아 해안 경비대장이 무전을 통해 불호령을 내립니다. “Vada a bordo, cazzo!” (배로 다시 돌아가, 이 자식아!) 이 세상의 분노 섞인 외침이 바로 그에게는 ‘신호등’이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는, 나 자신이 아니라 고통받는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평가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오랜 전통 안에서 “백성의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Vox populi, vox Dei)”라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처음에 던졌던 장궤틀 문제의 답을 여기서 찾으려 합니다. 이것이 저의 욕심인지, 아니면 공동체 전체의 선익을 위한 일인지를 분별하기 위해, 저는 이 문제를 본당의 모든 신자들에게 묻고 그 결정에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본당 신자 대다수가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동참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은총의 신호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많은 분들이 시기상조라고 여기거나 마음의 부담을 느끼신다면, 그것은 아직 때가 아니라는 주님의 뜻일 것입니다. 저의 욕심은, 여러분이라는 ‘하느님의 목소리’ 앞에서 멈춰 서야 합니다. 영화 ‘곡성’에서 평범한 경찰인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사건에 딸이 얽혀 들어가자 이성을 잃고 헤매기 시작합니다. 그는 경찰로서 사건을 해결하려는 ‘일’과, 딸을 살리려는 ‘사랑’ 사이에서 혼란에 빠집니다. 그런 그를 향해 한 인물이 절규하듯 외칩니다. 대한민국 모두가 아는 그 대사입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디’. 이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자아의 생존 욕구에 눈이 멀어 성전의 ‘금’을 좇을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바쳐 성전의 ‘주인’을 사랑할 것인가. 개신교는 성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면서, ‘뭣이 중헌지’에 대한 가장 확실한 답을 놓쳤습니다. 신앙에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도, 우리의 열심도, 우리의 봉사도, 그것이 사랑을 증가시키는 데 봉사하지 않는다면 모두 성전의 금을 좇는 행위일 뿐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사랑을 우리 안에 채워주는 유일한 신적 통로입니다. 이 진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아야 할 ‘뭣이 중헌지’의 최종 결론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1코린 1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