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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수단에 매몰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
작성자김백봉 쪽지 캡슐 작성일15:02 조회수19 추천수0 반대(0) 신고

   

 

 

 

 

 

2025년 다해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수단에 매몰 되지 않는 유일한 방법>

 

 

 

복음: 마태오 23,23-26

 






하느님의 아들이며 말씀이신 그리스도

(1540-1550), 모스크바 크레믈린 Cathedral of the Sleeper

 

 

 

 

 

    어제 우리는 ‘뭣이 중헌지’를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의 비극을 묵상했습니다. 영화 ‘설국열차’의 주인공 커티스처럼, 자신이 갇혀있는 시스템 안에서의 생존과 성공이라는 욕망에 눈이 멀어, 바로 창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비극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눈먼 인도자들의 또 다른, 그리고 어쩌면 우리에게 더 교묘하게 나타나는 특징을 지적하십니다. 바로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는 비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적이 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들의 신앙이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겉보기에는 누구보다 푸르고 무성한 잎사귀(신앙 행위)를 가졌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열매(사랑)가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나무를 가꾸는 ‘방법’(수단)에만 집착한 나머지, 나무를 가꾸는 ‘이유’(목적)를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율법에서 더 중요한 정의와 자비와 신의는 무시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모기는 걸러 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다.”

    보십시오. 그들은 박하 잎사귀 하나까지 정확하게 세어 십일조를 바치는, 완벽한 ‘방법론’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십일조 규정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래 ‘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수단), 그 빈자리에 하느님께 대한 신의와 이웃을 향한 정의와 자비를 채우라(목적)’는 거룩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라는 수단 자체를 목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십일조만 잘 내면, 정의롭지 않아도, 자비롭지 않아도 괜찮다고 착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살이(십일조 규정)는 꼼꼼하게 걸러냈지만, 낙타(정의, 자비, 신의)는 통째로 삼켜버리는 영적인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수단’이 ‘목적’을 삼켜버리는 이 비극이 과연 2000년 전 바리사이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거대한 낙타를 삼키는 수많은 눈먼 인도자들이 있습니다.

    2011년, 대한민국 최고의 영재들이 모인 카이스트에서, 불과 몇 달 사이에 젊은 학생 네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끔찍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학생은 유서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받은 학점은 B, 이것은 내가 쓰레기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학교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도약한다는 ‘목표’를 위해,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하고 학점이 일정 기준에 미달하면 징벌적 등록금을 부과하는 극단적인 경쟁 시스템(수단)을 도입했습니다.

 

 

    교육의 진짜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지혜를 배우고 인격체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 교육의 목적은 사라지고 오직 ‘학점’이라는 수단만이 남았습니다. 학점 경쟁이라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들은 친구들과의 우정, 배움의 즐거움,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라는 낙타를 통째로 삼켜버렸습니다. 결국 ‘최고의 인재’라는 잎사귀는 무성했지만, ‘살고 싶다’는 열매는 맺지 못했던 것입니다.

 

 

    얼마 전, 대구에서 10대 여학생이 건물에서 추락하여 머리를 심하게 다쳤습니다. 119 구급대가 즉시 출동했지만, 비극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정신과 병력이 있어 안됩니다”, “수술할 의사가 없습니다”, “병상이 없습니다.” 인근의 모든 대학병원들이 이런저런 규정(수단)을 내세우며 소녀를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구급차는 두 시간이 넘게 대구 시내를 헤맸고, 그 사이 소녀는 차 안에서 심정지가 왔습니다. 결국 다른 지역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소녀는 끝내 숨지고 말았습니다.

 

 

    병원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밤, 병원들은 환자의 상태나 규정, 시스템의 한계라는 ‘수단’ 뒤에 숨어, 죽어가는 한 생명이라는 ‘목적’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규정이라는 하루살이는 철저하게 지켰을지 몰라도, ‘네 이웃의 생명을 구하라’는 가장 큰 계명, 그 거대한 낙타를 삼켜버린 것입니다.

 

 

    이 비극은 우리 교회 안이라고 예외일까요? 우리 가톨릭의 보물인 전례, 그 안에서는 과연 ‘뭣이 중헌지’가 잘 지켜지고 있을까요?

전례의 목적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변화되어, 세상 속에서 그 사랑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미사의 모든 예식과 규정들은 바로 이 거룩한 목적을 위한 ‘수단’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이 수단 자체에 갇혀, 더 큰 목적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곤 합니다.

 

 

    어떤 신자분이 저에게 이와 비슷한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당신 아드님이 큰마음을 먹고 몇 년 만에 성당에 나왔는데, 미사 때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어느 열심한 자매님이 다가와 “성당에서는 주머니에 손 넣는 거 아닙니다.”라며 날카롭게 핀잔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일로 아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다시는 성당에 나오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미사 중에 공손한 자세를 취하는 것(수단)은 물론 좋은 예절입니다. 그러나 그 예절의 목적은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 자매님의 마음속에서, ‘공손한 자세’라는 수단이 ‘냉담자를 환대하고 이끄는 사랑’이라는 더 큰 목적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미사 예절’이라는 하루살이는 걸러냈지만, ‘상처 입은 영혼 하나’라는 거대한 낙타는 삼켜버린 것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미사곡의 음정 하나 틀리는 것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정작 그 노래가 담고 있는 찬미와 감사의 마음은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제대의 꽃꽂이가 조화로운지, 해설자의 목소리가 매끄러운지는 꼼꼼히 살피면서도,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의 신비에는 무감각해질 때가 있습니다. 전례의 형식과 규정이라는 ‘잎사귀’는 누구보다 푸르고 무성하지만, 정작 우리가 맺어야 할 ‘사랑과 환대’라는 열매는 점점 시들어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제대가 마주한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뀌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자아의 생존 욕구’가 ‘사랑의 욕구’를 압도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살아남고, 병원의 손실을 막아야 살아남고, 전례의 권위를 지켜야 내 자리가 살아남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만약 학교의 첫 목적이 학생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병원의 첫 목적이 환자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사제의 첫 목적이 아이에 대한 사랑이었다면, 오늘의 이 끔찍한 비극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이 목적이 아니면 모든 수단이 목적이 됩니다. 

어느 날 한 노인이, 밀물에 밀려와 해변에서 죽어가는 수천 마리의 불가사리들을 하나씩 바다에 던져주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다가와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이 해변에 있는 불가사리가 몇 마리인 줄 아세요? 지금 하시는 일은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러자 노인은 허리를 굽혀 불가사리 한 마리를 더 집어 들고는, 힘껏 바다에 던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한 마리에게는 의미가 있지.”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규칙을 완벽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부족한 수단까지도 완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무엇이 중한지 잊지 않는 사람은 사랑만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뿐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이 말을 잊지 맙시다. 

    “얼마나 많이 주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작더라도 그 안에 얼마만큼 사랑과 정성이 깃들어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저는 결코 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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