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죽음이라는 여행 전날의 설레는 오늘의 삶> 복음: 마태오 23,27-32 
LORENZETTI, Pietro 작, (1325) |
오늘 복음은 뭣이 중한지를 모르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라고 질책하십니다.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지금은 잘나 보이지만, 언젠가 그 속이 드러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섬겨 눈이 먼 이들은 뭣이 중한지 모르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분을 죽이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라고 하십니다. 세속과 육신, 마귀는 눈을 멀게 하는 것을 넘어서서 사람을 모기로 만들어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의 피를 빼앗는 살인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죽인 자를 나중에 심판관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에 나오는 용병이자 노예상인 ‘로드리고 멘도사’가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는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사냥하여 노예로 팔아넘겼고, 심지어는 질투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친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삶은 철저히 ‘빼앗고 소유하는’ 생존의 법칙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정글에는 전혀 다른 법칙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회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원주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들의 상처를 닦아주며, 그들과 함께 먹고 자는 ‘사랑의 법칙’으로 살았습니다. 멘도사의 눈에, 이 선교사들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음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는 사랑을 실천하는 그들을 경멸했고, 그들의 공동체를 위협했습니다.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가리옷 유다’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이라는 세속의 욕망 때문에, 사람이 되신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삼구에 빠진 영혼은 결국 사랑과 사랑하는 이들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박해하며 산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자신들 죽음 뒤에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심판이 있음을 직감합니다. 어떤 것도 저절로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하게 만든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십시오. 어떤 것도 저절로 생겨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만든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만들었을까요? 반드시 우리에게 유용하게 하려는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유용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담기지 않고 만들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만들어진 것은 결국 그 주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도자기를 만들고 조금이라도 흠이 있으면 바로 깨버리는 사람은 왜 그럴까요? 자기 명예도 있지만, 불완전한 것을 사람들에게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의 법칙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을 살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존재가 되어야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날 용기를 얻는 것처럼 사랑 자체이신 심판관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1990년 10월, 열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복녀 키아라 루체 바다노(Chiara Luce Badano, 1971-1990)가 있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의 평범하고 활기찬 소녀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하고 노래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열일곱 살 되던 해, 골육종이라는 끔찍한 암 진단을 받습니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두 다리가 마비되었고,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녀도 절망했습니다. “왜 저에게 이런 일이, 하느님?” 하고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를 통해, 이 고통이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특별한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의 병실은 더 이상 절망의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찾아오는 친구들을 위로하고, 자신의 고통을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들을 위해 봉헌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결혼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이 입을 하얀 웨딩드레스를 골라달라고 부탁했고, 장례미사 때 부를 노래를 직접 정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곁에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엄마, 안녕.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하니까요.” 그녀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여행을, 사랑하는 신랑을 만나러 가는 신부의 설렘으로 준비했던 것입니다. 여행은 가서 보다 가기 전에 더 행복하고 설렙니다. 죽음이 행복한 것이 되지 못하면 절대로 오늘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학을 가기 싫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마리아 발토르타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이탈리아어로 읽을 수 있고, 성체 성혈 기적이 일어난 란치아노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유학은 부담스럽지만, 그런 기대감이 있어서 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죽음 앞에서 칭찬받을 기대와 희망이 없다면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는데 오늘을 기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칭찬받을 일이 있다면 죽음이 기다려집니다. 이것이 매일 행복하게 사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삶. 바오로 사도도 이것을 기대하며 평생 행복하게 산 사람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2티모 4,7-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