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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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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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9-04 | 조회수62 | 추천수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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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4.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콜로1,9-14 루카5,1-11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 “늘 새로운 시작”
"주님의 집에 가자 할 제, 나는 몹시 기뻤노라."(시편122,1)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시 걸으면서 가장 많이 바쳤던 시편 성구 노래였습니다. 어제 옛 친구들 카톡방에서 아이슬란드 순례 여행에 오른 친구의 지칠줄 모르는 탐구 열정이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즉시 인터넷에서 인구 40만 정도의 불과 얼음의 나라, 신비롭고 아름다운 아이슬란드를 찾아봤습니다. 이 또한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11년전 2014년도 제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하루하루 날마다, 비가 오던 눈이 오던, 평온하던 바람이 불던, 덥던 춥던, 주님의 전사답게 한결같이 새벽길을 걷기 무려 수십년이 흘렀습니다.
매일 새벽 수도원 경내를 휴대폰 후랫시를 들고 기도하며 산책할 때마다 산티아고 순례시 매일 헤드랜턴을 하고 새벽길에 올랐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기뻤던 일은 어제의 자리를 <떠나>, 날마다 주님을 <따라>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길을 걸었던 일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이렇게 주님을 따르는 설렘의 기쁨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아,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영원한 현재 진행형이구나!”하는 깨달음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외적 여정에 대한 욕구를 말끔히 해소하여 오늘 지금 여기 제자리 정주의 삶중에도 날마다 새로운 시작의 내적순례여정에 오르게 합니다. 오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전 과정이 내적 순례 여정에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 겐네사렛 호숫가 예수님께 몰려 드는 사람들의 장면에서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욕구가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습니다. 새삼 인간의 본질은 ‘말씀’이며,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인간 존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곤 그 무엇도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습니다. 시몬의 배에 오르시는 예수님의 선택이 우연이 아님을, 말그대로 주님의 구원섭리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찾아 오시니 바로 이것이 반갑고 고마운 복음입니다. 먼저 주님은 시몬에게 말을 건넴으로 접근하시니 예수님은 첫눈에 시몬의 내적갈망을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말씀을 마치시자 시몬에게 던지는 화두같은 말마디는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를 향합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바로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가 ‘깊은 데’입니다. 어리석게 엉뚱하게 멀리 밖으로 깊은 데를 찾아 방황할 필요는 없습니다. 눈만 열리면 어디나 하느님 계신 깊은 데입니다. 시몬의 진솔한 대답이 그대로 텅빈 허무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말 그대로 인생 허무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평생 노력하며 애써온 인생인데 내면은 코헬렛의 ‘헛되고 헛되다’라는 탄식이 나오는 텅빈 허무라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는지요! 즉시 연상되는 바, 시편 127장의 고백이요 그대로 시몬의 심정을 반영한다 싶습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
이런 내적 허무감에 빠져 있는 사랑하는 시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찾아 오신 주님이십니다. 급기야 시몬은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으니, 주님께서 함께 하실 때, 텅빈 허무는 텅빈 충만의 기쁨과 행복의 구원으로 바뀜을 깨닫습니다. 이런 장면을 목격하면서 주님을 발견한 시몬의 자발적 회개의 고백이 감동적입니다. 그처럼 내적 공허와 갈망이 깊었음을 반영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스승님은 주님으로 바뀝니다. 마침내 주님을 만나 내적 목마름은 완전히 해갈되었습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스런 제 모습을 발견하니 저절로 회개입니다. 이와 흡사한 체험은 아브라함(창세18,27), 욥(42,6), 이사야(6,5)에게도 나타납니다. 결코 우연한 주님과의 만남은 없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시몬의 주님을 찾는 내적갈망이 있었기에 주님은 찾아 오시어 시몬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시몬을 격려하시며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두려움은 주님을 만나야 해결되는 우리 인간 모두의 근원적 정서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두려움과 불안은 사라지고안정과 평화가 자리합니다. 이제부터 사람을 낚는 복음 선포의 사명이 시작된 것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요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라는 신원의 삶을 살게 된 어부 시몬과 그 일행들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만약 복음의 어부들이 <구원의 출구>인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부들과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펼쳐졌을까요? 평생 무지와 허무의 자리에서 맴돌다 헛된 인생을 살았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 여기 미사에 참석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섭리는 어부 시몬을 부르셨고 우리를 부르시어 최선, 최상의 구원의 순례 여정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명 부여에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주님께 불림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감있는 삶을 살게된 어부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비로소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늪에서 벗어나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찾았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이요, 진짜 참 삶을 살게 된 어부들이요 우리들입니다. 한 두 번 만남과 따름이 아니라 평생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순례 여정”에 항구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기도가 콜로새 신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에게도 큰 격려와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이 모든 영적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콜로1,9-11)
이 기도가 그대로 이뤄지는 이 거룩한 미사의 은혜입니다. 주님과 만남과 따름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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