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연중 제23주일 다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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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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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9-07 | 조회수78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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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3주일 다해] 루카 14,25-33 "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참된 행복을 누리고, 저 세상 즉 하느님 나라에서는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이 두가지 목표를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려면 이 세상의 법칙을 따라야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려면 하늘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 둘을 분리해서 따로 추구하면 어느 하나도 제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딴 세상’이 아니기에,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나아가기에 그렇지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부터 그리고 앞으로도 쭉 참된 행복을 누리려면 이 세상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소유의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미련을 두고, 가지고 있는 것에 집착하면 오히려 행복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인답게 변화되어야 지금 여기에서부터 참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시작하여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존재의 삶을 살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첫번째 방법은 부모와 형제, 배우자와 자녀,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너무도 매정하게 들릴 뿐 아니라,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십계명과 또한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주님의 가르침과 배치되기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지요. 그러므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그 의도를 제대로 헤아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누구를 누구보다 ‘덜 사랑하다’라는 뜻을 나타내려면 ‘미워하다’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결국 가족과 자기 자신을 미워하라는 말씀은 내가 소중히 여기며 애착하는 그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며, 그분 뜻을 따르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는 뜻이 되겠지요. 이 말씀은 다른 한편으로 나 자신과 가족들만을 사랑하려 드는 이기적이고 좁은 마음에서 벗어나, 더 넓은 차원의 사랑을 실행하라는 권고이기도 합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 게 우리의 본성이니,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데에는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진 않지요. 그러나 그 울타리 바깥에 있는 이들을 나 자신처럼 여기며, 주님을 대하듯 사랑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이기적 ‘본능’을 거슬러, 하느님이 우리 영혼에 심어주신 선한 ‘본성’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결단이 필요합니다.
두번째 방법은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따라 사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과 시련, 오해와 시기, 미움과 박해 이 모든 것을 가리키는 게 바로 ‘십자가’이지요. 그런데 쉽고 편한 것을 찾는 게 우리 인간의 본성이기에,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왜 져야 하는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참된 행복을 누리는데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 일은 더 어려워지지요. 그러나 십자가는 그 이유와 의미를 깨달아야 질 수 있는게 아니라, 먼저 십자가를 제대로 져야만 그 이유와 의미를 조금씩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은 ‘지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의 원래 뜻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동사는 원래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듯, ‘소중하게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짊어지면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짐짝’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는 나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지요. 어머니가 아기를 사랑으로 가슴에 품듯,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그분을 따르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그 십자가 안에 스며든 주님 사랑을 느끼며 그분의 뜻과 계명을 실천할 힘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이 무턱대고 덤벼들어서는 안됩니다. 탑을 세우려는 사람이 공사 일정이나 필요한 경비를 제대로 계산해보지 않고 무턱대고 덤벼들면 공사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십자가를 지는 일도 먼저 철저한 자기성찰을 통해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 상태를 정확히 파악한 후, 그에 맞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야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뒤를 끝까지 따를 수 있습니다.
세번째 방법은 ‘자기 소유를 다 버리고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남아 돌아서, 필요 없어서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주님을 위해서,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즉 버리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버리는지를 아는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자기 소유를 버린다는 건 그저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끊어내는 것만을 가리키는게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버리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는 원래 ‘거부하다’, ‘부인하다’라는 뜻이지요. 즉,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 드는 ‘교만’을 거부하는 것이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하며 또 옳은 길임을 인정하지 않고 내 뜻이 맞다고 우기는 ‘고집’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뜻과 주관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그분께 제대로 순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순명이야말로 주님의 제자들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하며 꼭 필요한 덕목이지요. 예수님은 이처럼 순명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평화협정을 청하는 임금에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이만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전쟁을 하러 오는 임금에게 만명의 병사 만으로 맞서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서로의 전력차를 제대로 헤아리지 않고 전쟁에 임하는 건 용기보다 ‘객기’에 가깝지요. 객기로 시작한 전쟁에서 패한다면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사신을 보내어 평화협정을 청하라고 하십니다.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얻으려면 임금으로써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아야하겠지만, 그것이 모든 걸 잃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은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비슷합니다. 한낱 미천한 피조물에 불과한 내가 전능하신 하느님께 맞선다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내가 살 길은 하느님께 온전히 항복, 즉 순명하는 것 뿐이지요. 하느님께 순명하면 지금 당장은 모든 걸 잃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잃은 것들보다 훨씬 더 귀하고 좋은 것들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또한 영원토록 계속될 참된 평화까지 주시지요. 그러니 괜히 쓸 데 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종말의 날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즉 아직 구원 받을 기회가 남아 있을 때에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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