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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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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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9-12 | 조회수80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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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카 6,39ㄴ-42).”
1)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는 없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다른 사람을 회개시킬 수는 없다.”, 또는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는 없다.”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는, “둘 다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게 된다.”입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만 따라서 그 길을 걸어가는 생활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그 길 하나뿐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이 나왔습니다. 그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만일에 그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다른 것을 말한다면, 그것은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서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이단’입니다.>
2)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표현에 초점을 맞추면, 자기 자신의 ‘큰 죄’는 깨닫지 못하면서 남의 ‘작은 실수’를 비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1-3.7)”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은 ‘티’처럼 작은 실수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에 빠져서 자비를 실천하지는 않으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 바리사이들의 죄는 ‘들보’입니다.
3)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누가 ‘티’이고, 누가 ‘들보’인지 따지고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의 죄는 ‘들보’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말씀은, “어찌하여 너는 형제를 죄인이라고 비난하면서, 너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은 왜 깨닫지 못하느냐?” 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 말씀은 다음 이야기에 연결됩니다.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투덜거렸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29-32)” 당시에 세리들은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고, 실제로 대부분의 세리들이 죄를 짓고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그런 죄인들과 어울리시는 것을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는, “세리들과 같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보니 당신들도 죄인들이다.”입니다. 이 말에는, “우리는 의인들이다.” 라는 뜻과 “저런 죄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기준으로는 바리사이들도 죄인들이었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 그래서 죄인들을 만나는 것이다.” 라는 뜻이고, 동시에 “너희도 병든 이들이고, 너희도 죄인들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세리들이나 똑같이 회개해야 할 죄인들, 똑같이 메시아의 구원이 필요한 ‘병든 이들’이었습니다. 의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라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4)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는, “너부터 회개하여라.”이고,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자신의 들보를 빼내기만 하면, 형제의 티를 빼낼 자격이 생긴다는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너희는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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