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신앙인은 성모님을 본받아 주님과 함께 사는 사람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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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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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9-15 | 조회수44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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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1)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성모님의 고통을 기억하고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처음에는 ‘메시아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또 ‘메시아를 보호하기 위해서’ 겪으신 고통이었고, 나중에는 신앙인으로서 ‘메시아와 함께’ 겪으신 고통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실 때부터 그 고통을 감수하겠다고 각오하셨을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할 때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일방적으로 통고한 일로 보이지만, 내용을 잘 보면, 천사는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설명한 다음에 성모님의 뜻을 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8).” 여기서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라는 말은, 성모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천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응답을 듣고 나서 떠나갔음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성모님의 응답을 기다렸다는 것은, 그 전에 어떤 질문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성모님의 응답이 “저는 바랍니다.”이기 때문에, 아마도 천사의 질문은 “너도 원하느냐?”였을 것입니다. <성모님의 응답의 뜻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저도 원합니다. 그래서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응답하실 때, 당신이 메시아의 어머니로서 겪어야 할 고통도 기꺼이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루카복음 2장에 기록되어 있는 ‘시메온의 예언’은 단순한 예언이 아니라,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과 각오를 찬양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이 말에는, “당신은 극심한 고통을 겪겠지만,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뜻은 주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헤로데를 피하여 급하게 피신해야만 했던 일과 피난살이도 감내해야 할 고통이었는데, 그 고통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어머니의 고통이기도 하고, 메시아를 지켜 드리기 위한 신앙인의 고통이기도 합니다.
2)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고통을 ‘예수님과 함께’ 겪으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직접 겪으신 예수님의 고통보다 그 고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고통이 더 컸을 텐데, 성모님께서는 어머니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그 고통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계셨을 것이고,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다는 것도 믿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고통과 슬픔이 작아지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은 고통과 슬픔에 굴복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힘을, 또 고통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3)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4)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신앙인이기 때문에, 또 신앙인으로서 겪는 고통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 감수하는 고통입니다. <신앙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고통들도 있고, 그런 고통은 그냥 피하거나 물리치는 것이 옳습니다.> 신앙인의 고통은 신앙인 혼자서 겪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겪는 고통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고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기 전에 사실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와 함께 살고 계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이 모든 것을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5) 베드로 사도는 ‘시련’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5-7).”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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