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못 박힌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몸에 지닌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 /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09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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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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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9-22 | 조회수53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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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상(五傷)의 성 비오 신부는 1887년 이탈리아의 베네벤토 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8남매의 넷째로 태어났다. 그의 유아 세례명은 프란치스코로 어려서부터 기도와 묵상을 즐겨했다. 1903년 16세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해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 뒤 1907년 1월 27일 종신 서원을 하고, 1910년 8월 10일 23세 때 고향의 주교좌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사제품을 받은 후 1년 정도 지난 1911년 9월 7일 그의 두 손, 특히 왼손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은 상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1918년까지 거의 매주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오상의 흔적이 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915년 10월 10일부터였다. 그는 오상이 보이지 않도록 해주기를 예수님께 간청하였고 얼마간은 별 흔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1915년 11월에 징집되어 1918년 해제받기까지 수차 병가를 받았고, 결국 기관지염으로 군 복무 불능 판정을 받아 산조반니 로톤도의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비오 신부는 1918년 9월 20일 다시금 그의 두 손과 두 발과 옆구리에 오상의 흔적을 알았다. 오상은 처음에는 작았으나 몇 달 만에 점점 커졌고, 그 후 그는 아물지도 덧나지도 않는 고통을 50년이나 겪었다. 이 오상 소문은 널리 퍼져서 수도원을 찾는 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성인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오해와 의혹의 눈길을 받게 되었다. 1923년에 그는 수도원의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봉헌하되 외부인은 참례할 수 없다는 지시를 받았고, 그에게 오는 편지의 답장도 금지 당했다. 그 후 미사는 다시 성당에서 봉헌하게 되었으나, 이런 제재는 되풀이되었다. 1931년에는 미사 이외의 모든 성무 집행이 정지되었고, 미사도 경당에서 복사 한 명과 봉헌하도록 제한되었다. 성인은 이를 하느님의 뜻이라며 순명했다. 격리 기간 동안 성인은 미사와 기도로 지내다가 1934년에 가서야 고해성사를 주게 되었다. 그 후 1960년에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축하식, 1963년에 수도복 착복 6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그리고 1968년 9월 20일 그의 오상 50주년을 축하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성인은 1968년 9월 22일 오전 5시에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 23일 새벽 2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충만한 비오 신부는 자신의 성소를 충실히 살면서, 신자들을 영성적으로 지도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신앙은 곧 삶이었고, 신앙 안에서 모든 행실을 행하였다. 이 신앙은 그가 알 수 없는 하느님 뜻마저도 받아들이게 인도했다. 그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고통에서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하느님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1999년에 시복되었고, 2002년 6월 16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인품에 올랐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의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오상의 비오 신부’로 알려진 성인은 사목적 열정으로 직무에 헌신하면서, 신자들을 참회자를 화해시켰으며 가난한 이와 병자를 보살피고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 백성을 섬겼다. 그리고 1918년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전히 몸에 지닌 고통을 느꼈다.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0923](마태 16,24-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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