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 대중적인 라틴 말로 불가타 성경을 번역한 사제 학자 교부 /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09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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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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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9-29 | 조회수28 | 추천수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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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예로니모는 347년경 현재 보스니아의 그라호보의 부유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12살 무렵부터 로마에서 수사학과 고전 라틴 문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 지식은 물론 고대 학자들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연구 업적으로 명성을 얻고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후, 오늘날 독일의 트리어에서 정부 관리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성 아타나시오 주교가 유배를 와 전파한 동방 수도생활을 접하고 크게 감동해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할 마음을 품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철저한 수덕생활을 실천하려는 중 375년 사순시기에 꾼 꿈속에서 재판관이신 주님을 뵙고 삶의 결정적 전환점인 회심을 하였다. 그 후 사막으로 가 은수생활을 하며, 성경 언어 연구 매진하였다. 379년 봄에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고는 로마로 돌아와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비서로 임명되어 교황을 보좌하는 임무를 맡았다. 교황은 그에게 신구약 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다. 당시에도 이미 여럿 라틴어 번역본이 있었지만, 교황은 성 예로니모에게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라틴어 성경본을 다시 만들도록 위촉한 것이다. 한편 성인은 번역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영적인 수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팔레스티나로 간 그는 386년 여름부터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여러 수도원을 세우는 데 경제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리고 순례자들을 위한 숙소도 짓고 수도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 직접 강의도 맡았다. 그 뒤로 성인은 베들레헴에서 34년 이상 성경 번역 활동에 몰두하며 당시 몇몇 이단적 가르침을 반박하는 글도 발표하였다. 성 예로니모의 가장 큰 업적은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명을 받은 때부터 405년 완역 때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었다. 신약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고, 구약은 히브리어 원문에서 라틴어로 직접 번역하였다. 이 성경이 ‘대중적’이라는 뜻인 ‘불가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성 예로니모 당시가 아니라 13세기경이었다. 이유는 성인의 번역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할 뿐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가타 성경을 통해서 중세 유럽인들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성찰하는 법을 배웠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16세기에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 번역본을 교회의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으로 인정하는 칙령을 반포하였다. 성인은 406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번역 일에 대한 귀중한 자료들도 남겼다. 420년 9월 30일에 성 예로니모도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성인은 라틴 교부들 가운데 가장 박학한 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고, 동시대 사람 중에서 라틴어와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탁월한 인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은 물론, 수덕 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은 그물과 같다.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올려, 좋은 것은 모으고 나쁜 것은 던져 버린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성인은 ‘이사야서 주해’ 서문에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과 같다.’ 라고 기록했다. 그는 암브로시오, 그레고리오,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교회 4대 성인교부로 존경받고 있다.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0930](마태 13,4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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