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송영진 신부님_<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접대하는 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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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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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09-30 | 조회수44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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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1)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바로 뒤에 나오는,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라는 말씀에 연결됩니다. 이 이야기는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비유가 아니라, 당신의 실제 처지를 표현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는 중이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의 거부와 배척은 십자가 수난의 서막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에 보내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행의 숙소와 음식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마을의 사마리아인들이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당시에 예루살렘으로 가는 유대인 순례자들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 때문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몹시 화가 나 있었던 것을 보면, 여기서 ‘맞아들이지 않았다.’ 라는 말은, 못 들어오게 막았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박해하고 모욕하면서 쫓아냈음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들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그들은 자신들이 박해받고 모욕당한 것은 곧 예수님이 박해받고 모독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 그래서 더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2)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입니다. 아마도 두 사도는, 사마리아인들이 메시아이신 분을 모독하고 박해한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해서 한 일이라고 해도, ‘천벌 받아 마땅한 죄’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에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과 반감,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과 업신여김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서 사람들에게 천벌을 내린 일은 엘리야 예언자가 한 일입니다(2열왕 1,10-12). 두 사도가 그런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데, 어떻든 두 사도가 몹시 화가 나서 어떻게든 앙갚음을 하기를 원했다는 것은 분명하고, 그것은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모습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3) 우리는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예수님은, ‘심판자’가 아니라 ‘구세주’로 오신 분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믿기를 거부하고 예수님과 신앙인들을 미워하고 박해한다는 이유로, 아무 때나 곧바로 천벌이 내렸다면? 용서와 자비가 없는 구세주는 구세주가 아닙니다.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집주인을 베엘제불이라고 불렀다면, 그 집 식구들에게야 얼마나 더 심하게 하겠느냐?(마태 10,25ㄴ)” 사마리아의 어떤 마을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일은, 나중에 제자들도 겪게 될 일의 예고편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사도들이 선교활동 과정에서 거부당하고 배척당할 때마다 맞서 싸우고, 저주하고, 천벌이 내리기를 청했다면, 그러면 가는 곳마다 전쟁터가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면서 전쟁만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가르침들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꾸짖으신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4) 예수님께서 다른 마을로 가신 일은, 힘이 없어서 무기력하게 피하신 일도 아니고, 그 마을을 ‘버리신 일’도 아니고, 그 마을의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한, 일종의 ‘무언의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낯선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접대하는 것이라는 가르침이 성경에 있습니다(히브 13,2).>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는, 나중에 심판 때에, “우리는 그분이 메시아이신 줄 몰랐다.” 라고 변명할 텐데, 몰랐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마태 25,42-45). ‘사랑 실천’은 아는 사람에게만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친하든지 안 친하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 모든 사람에게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여서 숙소와 음식을 제공했다면, 그들은 ‘복음’을 전해 받았을 것이고, 그리고 만일에 그곳에 병자들이 있었다면 ‘치유의 은총’도 받았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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