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9월 30일 수원교구청 묵상글 | |||
---|---|---|---|---|
작성자최원석
![]() ![]() |
작성일2025-09-30 | 조회수52 | 추천수1 |
반대(0)
![]() |
김건태 신부님_인내의 시기
루카 복음 저자는 오늘 복음 말씀부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여정 이야기를 기술합니다(루카 9,51-19,28).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파스카 사건을 예고하시며, 당신이 떠난 다음에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일들을 준비시켜 나가십니다. 파스카 사건은 수난과 죽음을 전제로 하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신다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시고서 물러서지 않으십니다. 아무도 그분의 생명을 거둘 수 없습니다. 당신이 몸소 당신의 생명을 건네십니다. 기꺼이 건네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심부름꾼들을 사마리아로 앞서 보내 당신의 길을 준비하도록 하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유다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고을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성도로 여겼던 유다인들에게 사마리아인들은 혼혈 민족이기도 했지만, 가리짐 산 꼭대기에 그들 고유의 신전을 세운 이래, 혼합 종교를 신봉하는 이교도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상호 멸시적 또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사마리아 일부 지역을 통과하려는 유다의 순례자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걱정과 두려움을 앞세워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에서 사마리아를 통과하려 할 때마다 노골적인 적대감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오늘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이 분노를 머금고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제자들은 아마도, 예언자 엘리야가 아하즈 임금 시대에 오십인대장과 쉰 명의 부하들은 잇따라 두 번이나 불로 징벌한 사건을 상기하고서, 이와 같은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2열왕 1,10-20). 그러나 아무리 알아듣는 데 더딘 제자들이라 하더라도, 이와 같은 터무니 없는 제안은 스승 예수님을 당황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많은 시간 말씀과 행적으로 애써 가르치시려 했던 바를 아직도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제자들, 늘 그분과 함께 머물고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의 행적을 보았으면서도, 회개는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필요하며, 따라서 무엇보다도 인내심이 절대적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바로 이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이 꾸짖음 속에서 우리는 이미 교회 구성원 사이의 분열에 대한 주님의 경계심을 내다봅니다. 인내심 부족으로 교회 구성원들이 서로 단죄하고, 더딘 사람들과 우둔한 사람들을 멀리하거나 무시하며, 아니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인내심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내다보며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분노의 노예가 되어 마음에 복수를 품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다른 마을로 가자” 하고 제안하십니다. 분노를 삭이고 복수의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향한 마지막 예루살렘 여정에서도, 더는 기다릴 시간이 없을 것 같은 절박함 속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유를 갖고 신중한 자세를 견지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하루, 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던 사람들, 그래서 늘 경계하고 멀리하려 했던 사람들에 대한 못난 시선을 바로잡아, 인내심을 갖고 그들과 함께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과 행복의 길을 걸어갈 것을 다짐하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9,51-56: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굳게 나아가시는 모습을 본다. 이는 곧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을 향한 결연한 걸음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인들의 거절을 만나신다. 이때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분노하며 “주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멸망시키기를 원하십니까?”(54절)라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신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제자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 차이이다. 제자들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응징을 원했지만, 주님은 오히려 인내와 자비로 응답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복수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거절당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In Matthaeum homiliae 54,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는 여정에서 반드시 마주할 거절과 냉대를 미리 체험하게 하신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태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신다. 복수나 앙갚음이 아니라, 온유와 인내,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 삶 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많다. 내가 선의로 다가갔을 때, 누군가가 나를 거부하거나 무시할 수 있다. 또 때로는 나의 선입견과 편협한 판단으로 인해, 정작 나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내가 거절할 수도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경고한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말하면서도, 정작 그분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따른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2,5)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거절과 냉대를 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나는 주님의 은총을 내 기준에 맞추려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는 중요한 교훈이다.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언제나 세상으로부터 환영만 받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비난과 거절, 심지어 박해까지 경험한다. 그러나 교회의 사명은 앙갚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전투적인 군대가 아니라, 상처 입은 이들을 싸매는 야전병원”이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주님은 당신을 거절한 이들을 불로 심판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신다. 이는 포기의 길이 아니라, 더 많은 이를 구원하기 위한 사랑의 길이다. 우리도 삶 속에서 복음을 거부당하거나 무시를 당할 때, 분노나 실망 대신 주님의 온유와 자비를 배워야 한다. 또한 내 기준에 주님을 가두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맞아들일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한다. 오늘 미사 안에서 우리가 모두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신 예수님”(마태 11,29)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하여야 한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9,53ㄱ)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자!'
오늘 복음(루카9,51-56)은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말씀'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은 '성 예로니모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로니모 신부님의 큰 업적은, 서기(AD) 382년 다마소 1세 교황의 지시에 따라 성경을 쉬운 대중 언어인 라틴말로 옮긴 일입니다. 그 성경이 바로 '대중 라틴말 성경'이라고 불리는 '불가타(Vulgata) 성경'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는 책으로서, 우리를 이제와 영원한 부활에로 인도합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제와 영원한 부활을 믿고 간절히 희망한다면,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119,105) "당신은 저의 피신처, 저의 방패 저는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시편119,114)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하느님의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주신 성 예로니모 신부님께 감사드리고, 말씀의 힘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갈릴래아에서부터 시작된 예수님 공생활의 여정은 배척과 고난의 여정이었습니다.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으셨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받으셨습니다. 마침내는 종착지인 예루살렘에서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배척받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합시다!
"주님, 천상 신비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며 그 수난에 참여하고,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 1사무23,6) 한상우 신부님_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마음을 굳혀야 삶다운 삶이 시작됩니다.
마음을 굳혀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 어느 것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가치입니다.
마음을 굳히고 마음을 꿰뚫는 우리의 결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마음을 단단하게 하려면 저마다의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 던지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서 고귀한 사랑을 만납니다.
사랑도 마음을 정한 곳에서 하느님 사랑을 닮아갑니다.
마음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역사가 되고 구원이 되는 그 길의 시작은 마음을 굳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망설임이 아니라 십자가의 여정을 받아들이는 열림이 필요합니다.
마음을 굳혀야 마음이 열리는 마음의 신비이며 마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음을 굳히시는 결단과 결심의 길을 가십니다.
피할 수 없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순명의 날입니다.
마음을 굳히는 것이 순명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마음의 결단이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의 열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