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0월 5일 수원교구청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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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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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05 | 조회수40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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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보잘것없는 종임을 감사하는 신앙생활 [말씀] ■ 제1독서(하바 1,2-3; 2,2-4) 기원전 7세기경 예언자 하바쿡은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나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하느님께 하소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백성을 위협하는 칼데아 사람들 역시 신통할 것이 별로 없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인내심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답하십니다. 악인들의 응벌 여부를 떠나, 의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느님께 성실한 사람들로 머물러 있어야 하며, 이를 증언하도록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 제2독서(2티모 1,6-8.13-14) 복음 전파자로서 시련의 삶이 종말을 고할 때가 다가온 것을 의식하자, 사도 바오로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테오에게 자신의 사명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던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전파되기 시작한 기쁜 소식, 그분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는 성령의 도우심이었음을 고백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에 힘입어 적대자들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으니, 모든 봉사자 또한 같은 도우심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 복음(루카 17,5-10) 참된 신앙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사건의 자연적 흐름을 되짚어보고 필요한 경우 그 흐름을 바로잡는 결단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은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자칫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들어 높이는 우를 범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업적을 이루어낸다는 정신으로 신앙을 살아야 하며, 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종으로서의 소명에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김] 비신앙인들이 별생각 없이 토해내는 비아냥거림, 신앙인이라는 우리조차 자주 빠져들고 마는 과오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적인 결과가 이게 뭔가 하는 원망의 소리일 것입니다. 비신앙인들만도 못한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이 앞을 향해야 할 우리의 신앙을 힘들게 하며 때로는 포기의 유혹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의로운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 신앙으로 참 생명을 얻게 되리라는 가르침을 전하며,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증인이 되기 위해 겪어야 할 고통의 시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은총의 선물로 생생하게 간직할 것을 권고합니다. 원망의 소리, 이는 결국 믿음이 부족해서이며, 믿음을 행동으로 보임에 있어 우선 되어야 할 인내의 결핍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능력을 믿는 신앙이기보다는 그분이 과연 그런 분인가를 시험하고 평가하려는 자기중심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런 과오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받들어 열심히 사는 가운데 맞이하게 되는 기쁨은 물론, 피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도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외칠 수 있는 신앙,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신앙생활로 이 한 주간 힘차게 달려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1.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사도들은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라고 청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양적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질과 순수성에 달려 있음을 가르치신다. 겨자씨는 지극히 작지만, 그 안에 강력한 생명력을 품고 있어 큰 나무로 자라난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작은 믿음이라도 진실하다면, 뿌리 깊은 뽕나무조차 바다에 심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란 단순히 어떤 것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행위이다.”(Homiliae in Matthaeum 58) 즉, 믿음은 우리의 계산과 확실성 너머에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는 태도이다.
2. 하느님 나라와 무상성 예수님은 종의 비유를 통해 믿음을 설명하신다. 종은 주인 앞에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봉사는 당연한 의무일 뿐이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10절) 이 말은 우리의 봉사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무상으로 받은 선물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한다 해도,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은총이 없이는 공로도 없다.”(De Natura et Gratia 36,42)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뿐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겸손을 낳는다.
3. 믿음의 힘: 일상 속의 기적 믿음은 거창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에서 드러난다. 믿음은 단순하고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운데, 우리의 모든 작은 행위를 비범하게 만든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행하는 힘이다. 그것이 작아 보여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지닌다.”(Commentarium in Matthaeum 13,2) 따라서 믿음은 매일의 삶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며, 두려움과 자만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4. 믿음과 무상적 봉사 예수님은 종의 비유로, 믿음이란 단순히 기다림이 아니라 활동적인 봉사임을 가르치신다. 믿음은 무력한 체념이 아니라, 은총 안에서 가능한 모든 것을 행하려는 적극적 실천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말한다: “하느님의 백성은 신앙으로 살아가며, 사랑으로 봉사하고, 희망 안에서 모든 것을 견디어 낸다.”(교회 41) 즉, 믿음은 하느님께 무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며, 동시에 이웃을 위한 봉사로 구체화한다.
5. 결론: 믿음은 시작이다. 믿음은 우리가 주님께 내딛는 첫걸음이다. 그것은 양적인 크기가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기는 질적인 태도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 같은 큰 사건보다도 오히려 작은 일상 속의 충실함이 믿음을 키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시작할 수 없고, 희망이 없이는 계속할 수 없으며, 사랑이 없이는 완성할 수 없다.”(Enchiridion 8)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도 사도들과 함께 고백합시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아멘! 전삼용 신부님_믿음만이 줄 수 있는 해답: 나는 누구인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정한 성공을 좇아 죽도록 열심히 살았는데도, 막상 정상에 서 보면 '이게 전부인가?' 하는 공허함에 휩싸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돈과 명예, 명성을 다 거머쥐었지만 결국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해답 없이는 아무리 많은 것을 성취해도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삶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전 세계인에게 웃음과 감동을 주며 아카데미상까지 받은 명배우였습니다. 누구보다 밝고 유쾌해 보였지만, 내면에는 극심한 우울증과 존재론적인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는 2014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로빈 윌리엄스는 코미디에 대해 "나는 웃음으로 자신을 숨긴다. 웃음은 때로 당신의 유일한 방어선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고백은 "나는 항상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해했다" 는 말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모든 것을 얻었음에도 그가 찾지 못한 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이 해답 없이는 우리의 존재가 흔들리고, 모든 행위는 결국 허무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 역시 사춘기 시절, 거울 속의 저 자신에게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며,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를 수없이 물었습니다. 이 해답 없이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해답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통해 이미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밭에서 힘들게 일하고 돌아오신 어머니가 주신 '단팥빵과 흰 우유', 아버지의 투박한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을 보며, 저는 의심 없이 확신했습니다. '아, 저분들이 내 부모님이 맞구나. 나를 위해 저렇게 애쓰시는 분들이구나.' 그 양식을 먹고 굳은살을 묵상하며, 저는 제가 부모님 없이는 존재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믿음은 저의 모든 행위에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곧, 나의 창조자가 누구이시고,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의 시작이자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루카 17,5) 하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비유와 '쓸모없는 종'의 비유를 통해 믿음의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종이 주인의 명령을 다 하고도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루카 17,10)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의 깊은 본질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주인)이 누구이신지 알고, 나(종)는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이 앎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양식'과 그 양식에 대한 우리의 '묵상'을 통해 자라납니다. 우리가 그 양식을 먹고 묵상하며 그분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금송아지'처럼, 즉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존재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여전히 자신이 세상의 왕이자 주님이라고 착각하며, 그 끝에는 허무만이 남을 뿐입니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실제 모델인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통찰력(하느님께서 주신 양식)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부모의 이혼과 불행한 가정 환경 속에서 그 재능을 타인을 속이고 자신을 보호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는 열여섯 살의 어린 나이부터 조종사, 의사, 변호사 등으로 위장하여 엄청난 사기 행각을 벌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는 주인으로 착각했고,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기보다 욕망과 생존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나는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신분으로 살 때 가장 자유로웠다"고 말했습니다. 성공과 쾌락을 경험했지만, 그의 내면은 늘 깊은 공허함에 시달렸고, 결국 FBI에 체포됩니다.
그는 체포된 후에도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자신이 받은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양식'을 먹었지만, 그것이 자신을 파멸로 이끌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세상의 왕이자 주인으로 착각했기에, 진정한 행복과 평화를 얻지 못하고 허무의 굴레에 갇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의 사랑(양식)을 알고,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며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주인의 더 큰 사랑과 행복을 얻어냅니다. 이들은 믿음의 본질을 깨달은 이들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에 등장하는 늙은 소를 보십시오. 최노인과 함께 40년을 넘게 일한 이 소는, 늙고 병들었지만 주인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귀한 존재임을 압니다. 주인이 주는 양식을 먹으며 주인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합니다. 이 소에게 최노인은 무엇이든 주고 싶은 마음을 갖습니다. 이 늙은 소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았기에, 그 존재 자체가 행복했고, 주인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감동적인 예는 우리에게 '그분을 알고 나를 아는 믿음'이 가져오는 행복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다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생각해 봅시다. 같은 아버지의 양식을 먹고 자란 두 아들, 하지만 그들은 확연히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양식(유산)을 가지고 떠나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처지를 깊이 묵상했고,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며 돌아옵니다.
그는 자신을 ‘쓸모없는 종’이라 여기며 아버지의 자비에 매달렸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송아지를 잡는 잔치를 베풉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아버지가 누구이신지를 깨달음으로써 아버지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입니다. 그에게 양식은 묵상을 통해 믿음의 완성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양식을 매일 먹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동생을 미워하며, 자신의 노력에 대한 대가만을 바랐습니다. 그는 양식에 대한 묵상이 없었기에,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했고, 아버지를 자신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에게 양식은 묵상이 없었기에 믿음의 성장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 채 분노와 시기심 속에서 허무한 삶을 이어갔습니다.
이렇듯 믿음은 저절로 증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그분을 더 알려고 노력하고, 그분이 주는 양식에 우리의 깊은 묵상이 더해질 때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그분을 알아가면, 그분은 더 커지시고 나는 더 작아집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부터 우리는 하느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막연히 구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더 알게 하소서. 이를 위해 매일의 양식을 주소서. 이 양식에 대한 저의 깊은 묵상을 더하게 하소서. 이를 통해 당신의 위대함을 매일 더 알아가게 하소서. 그래서 제가 누구인지, 저의 존재 의미를 깨닫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매일매일 그 양식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더할 때, 우리는 '쓸모없는 종'이라 고백하며 겸손하게 그분께 의탁할 수 있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겨자씨 한 알처럼 작더라도 산을 옮기고 바다에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기적을 이루는 위대한 힘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찾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한상우 신부님_"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작은 기쁨과 소중한 만남을 느끼는 믿음의 새날입니다.
믿음의 출발점은 분명 기도입니다.
믿음은 기도와 함께 자라납니다.
믿음은 불확실성을 견디는 용기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용기가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아내는 행위가 믿음입니다.
가장 좋은 것만을 주시며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가장 좋으신 은총이 바로 믿음입니다.
끝내 이해되지 않는 삶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이 우리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삶의 매 순간이 믿음의 여정입니다.
믿음은 삶을 지탱하는 근원적인 힘이며 사랑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며 고통을 의미로 바꾸는 힘입니다.
믿음은 성숙을 낳고, 성숙은 믿음을 깊게 합니다.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맡기고 그분 안에서 성장해 가는 영혼의 여정이 믿음입니다.
믿음을 더하는 내어맡김의 주일 되십시오.
믿음은 기도로 살아나고 자라납니다.
이병우 신부님_"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믿음의 힘으로'
오늘 복음(루카17,5-10)은 '믿음의 힘'과 '겸손하게 섬겨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믿음의 힘으로 하느님의 일(봉사)을 성실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믿음의 힘(기적)'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믿음의 힘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성소에 충실한 종, 겸손한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17,10)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일,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따라 하는 '하느님의 종들'입니다.
하느님의 종들인 그리스도인들은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까지 바쳐가시면서 일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봉사하려고, 그렇게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일(봉사)을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 한 작은 믿음'이면 된다고 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
믿음을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으로 말씀하십니다. 이는 믿음은 크고 작고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고의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쁘게 그리고 겸손하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묵묵히 성실하게 그리고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믿음의 힘으로 화이팅 합시다!
(~ 2사무1,27)
조명연 신부님_2025년 10월 5일 연중 제27주일
삶의 마지막 순간에 과연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1) 아~~ 내 인생은 참 의미 있었어. 2) 아~~ 내 인생은 참 허무했어.
첫 번째의 대답은 새로운 삶으로 넘어감을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답은 후회, 걱정,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삶을 점수로 매긴다면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그 점수에 따라 자기 마지막 순간의 말도 결정될 것입니다.
100점 만점에 90점(약간 부족하지만, 그럭저럭 만족), 50점(허무), 20점(매우 허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는 ‘100점짜리 삶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알아야 잘 살았는지 또 반대로 부족한지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100점 삶은 과연 무엇일까요? 답하기 좋게 객관식으로 제시하겠습니다.
1) 돈 많이 버는 것. 2)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 3) 무조건 건강한 삶. 4) 보람과 의미 있는 삶.
100점 삶이 우선 무엇인지 알아야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순간의 만족만을 추구합니다. 100점짜리 삶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생각하려 하지 않고, 순간의 만족이 마치 100점 삶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겨자씨의 비유로 그 믿음이 얼마나 커다란 힘을 가졌는지를, 그리고 종의 비유를 통해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겸손한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이로써 참된 믿음 즉,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걸맞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남을 죄짓게 하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함께, 형제가 죄를 짓더라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어려운 요구를 하십니다. 여기에 제자들은 자기들 믿음의 부족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믿음의 양보다 질이 중요함을 겨자씨의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장 작은 씨앗이 겨자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거대할 필요가 없고, 비록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더라도 살아 있고 참된 믿음이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종의 비유에서 나오는 종처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고백하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삶이 하느님 나라에서 보람과 의미 있는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참 기쁨과 행복이 있는 삶입니다.
오늘의 명언: 들어가기 망설여지는 그 동굴에 당신이 찾는 보물이 있다(조셉 캠벨).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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