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10월 7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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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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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07 | 조회수43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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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모 마리아하면 묵주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성모님과 묵주의 관계는 거의 불가분의 관계라 말할 수 있으며, 가톨릭 신자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주 올리는 기도가 묵주기도임을 감안한다면, 성모님은 가장 공경받고 가장 친근함을 주시는 분으로 마음에 새겨집니다. 때로는 성모 공경이 지나쳐 타종교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러함에도 우리에게 성모 공경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당연한 신앙 행위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의 정확한 유래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초세기의 은수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하여 150개의 시를 담고 있는 시편을 기도하면서, 작은 돌멩이나 곡식의 낟알을 굴리면서 시편의 횟수를 헤아린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흔히 묵주기도로 번역하는 라틴어 로사리오(Rosario)는 ‘장미꽃다발’을 의미하기에, 묵주 알 ‘하나하나’는 장미꽃다발 ‘한 송이 한 송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복음서의 요약이자 인류 구원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교회의 신비, 그리고 마리아의 신비를 요약하고 함축합니다.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와 영광의 신비로 15단 묵주기도가 자리하게 된 것은 15세기 말경이며, 정확히 오늘날과 같은 묵주기도는 ‘묵주기도의 교황’이라 불리는 비오 5세에 의해 1569년에 확정되었습니다. 오늘 축일은 교황 비오 5세가 묵주기도로 승리를 거둔, 1571년 레판토 해전 승리의 날을 기념하여 축일로 설정한 데서 비롯됩니다. 레판토 해전은 유럽의 가톨릭 국가를 위협하던 (지금의 튀르키예)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세력과 벌인 전투로서, 열세에도 불구하고 묵주기도로 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지중해를 통한 유럽지역으로의 이슬람 세력 진출을 가로막았던 역사적 전쟁이었습니다. 비오 5세 교황은 이 어려운 전투에서 승리는 오로지 묵주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도움뿐이라는 확신 아래,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권장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후 묵주기도는 모든 가톨릭 신자에게 널리 전파되었으며, 1883년에 교황 레오 13세는 회칙을 반포하여 10월 한 달을 묵주기도 성월로 설정하시기에 이릅니다. 한편, 바오로 6세 교황은 1967년 터키를 공식 방문하여, 레판토 해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탈취한 회교도의 국기를 되돌려 주며,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기념하는 대상이 더는 ‘전쟁의 무기’가 아니라 ‘평화의 신비를 낳으신 분’, 곧 주님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또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2002년 10월 16일에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에서 묵주기도를 ‘복음의 요약’이라 규정하시면서, 묵주기도가 그리스도 생애의 신비를 관상할 수 있는 탁월한 수단이며 평화와 가정을 위한 강력한 기도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교황은 특히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로 이루어진 전통적인 묵주기도에, 예수 그리스도 공생활의 다섯 가지 신비를 묵상하는 ‘빛의 신비’를 추가하고, 빛의 신비를 환희의 신비와 고통의 신비 사이에 바칠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묵주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사를 묵상하며, 구원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우리들의 삶을 묵상하게 됩니다. 교황 비오 10세는 “묵주의 기도만큼 아름답고 은총을 많이 내리게 하는 기도는 없다.” 하시면서 묵주의 기도를 매일 정성스럽게 바치라는 말씀을 남겼습니다.
묵주기도의 성월, 그 가운데서도 오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맞이하여, 묵주기도와 레지오 마리애 활동에 더욱 열정을 다할 것을 다짐하면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던 성모님의 전구로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모습을 갖춰나가는, 복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0,38-42: 마르타와 마리아
오늘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예수님을 맞이하는 장면이다. 두 자매는 모두 주님을 사랑했다. 마르타는 봉사와 환대의 모습으로, 마리아는 경청과 관상의 모습으로 주님을 맞고 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마르타는 봉사의 본보기를, 마리아는 관상의 본보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관상은 봉사의 뿌리이며, 봉사는 관상을 통해 힘을 얻는다.”(De Officiis, II,11,88).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태도를 칭찬하시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42절)라고 하신 것은, 봉사의 가치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일이 모든 봉사의 근원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참된 봉사도 사랑도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타는 성경 곳곳에서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보여준다. 오빠 라자로가 죽었을 때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요한 11,21)하고 고백했던 이는 마르타였다. 그녀의 사랑과 믿음은 진실했지만, 봉사의 분주함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잃고 짜증을 낸 것이다. 주님은 그 순간, 마르타를 책망하신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사랑으로 초대하신 것이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교회 안에서 봉사하고 활동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모든 활동이 말씀의 경청과 기도의 뿌리 위에 놓이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지치고 불평하게 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며, 신앙생활의 숨결이다.”(2565항). 마리아가 보여준 관상의 태도는 모든 신앙인의 기본자세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나는 말씀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혹시 봉사와 활동에 몰두하느라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서 멀어진 것은 아닌가?
우리는 마르타처럼 봉사하면서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균형 잡힌 제자가 되어야 한다. 말씀에서 생명과 힘을 얻을 때, 우리의 봉사는 불평이 아니라, 참된 기쁨과 열매로 이어질 것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42절)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초대이다. 오늘 하루, 우리도 잠시 분주함을 멈추고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그때 우리의 봉사도 더욱더 복음적이고 열매 맺는 봉사가 될 것이다. 아멘. 한상우 신부님_"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루카 10, 42)
한가지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통한 자기변화입니다.
가난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를 펼쳐보인 성 프란치스코의 맑은 삶이 우리의 오늘을 비춰줍니다.
복음적 가난을 선택한 삶은 하느님과 이웃을 속이지 않습니다.
사랑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참된 회개는 가난을 가난은 정신을 만들며 살아계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장 좋은 기쁨을 보여줍니다.
가난은 온전한 생명이며 온전한 성장이 됩니다.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가난의 삶은 바로 자신을 낮추는 참된 행복입니다.
참된 가난은 양극단을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자신의 위치를 알게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가르쳐줍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은 모든 것과의 소통이었습니다.
소통은 생명의 참모습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깨우쳐줍니다.
삶의 질적인 변화는 마음의 참된 변화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자체에 행복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시작은 언제나 자기 자신부터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소유가 아닌 사랑을 모든 것을 나누는 사랑이 가난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가난은 계산할 것이 없어 모든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삶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가난의 기쁨입니다.
하느님의 맛은 맑은 가난의 맛 청빈입니다.
오늘도 작은 빵으로 부유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의 가난이십니다. 조명연 신부님_2025년 10월 7일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누군가가 매일 내 귀에 대고 부정적인 말만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저는 긍정적인 사람이 될까요? 아니면 부정적인 사람이 될까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부정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정은 전염됩니다. 즉, 자기가 느끼는 감정은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세계관에도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뉴스를 잘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뉴스에는 부정적인 말, 인상을 쓰게 하는 내용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 반성합니다.
희망의 전달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라는 희망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듯이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긍정적인 말과 행동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나를 위해서, 특히 나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행복감이 증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맛도 좋고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정크푸드가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에는 좋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말이 훨씬 관심도 가고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기 영혼의 건강은 나빠지게 됩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어떤 말과 행동을, 또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합니다.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복음에서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신 뒤에,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합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만 듣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래서 마르타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분주하다는 표현은 ‘정신이 산만해지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위한 선한 봉사를 하고 있었지만, 일의 많음에 짓눌려서 마음의 중심을 잃고 염려와 불평에 사로잡힌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더구나 마르타는 마리아가 자기 동생인데도 직접 말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 불평합니다. 예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마음인 것이지요.
염려와 불평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에서, 처음 예수님을 맞이했을 때의 기쁨은 상실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루카 10,41)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르타의 수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면 상태를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많은 염려와 걱정으로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불평 안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긍정적인 마음, 희망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우리 자신밖에 없다(괴테). 이병우 신부님_<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10.7)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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