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주님의 기도 “회개와 배움의 여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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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선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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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08 | 조회수47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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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8.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요나4,1-11 루카11,1-4
주님의 기도 “회개와 배움의 여정”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4)
참 어둡고 혼탁한 세상이요 구원의 빛을 찾는 인간들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살기 위해, 영혼이 살기 위해, 참으로 진짜 살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아니곤 답이 없습니다. 결코 무지와 허무의 어둠의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라는 말마디에서 예수님께 기도는 일상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기도의 일상화’라 할 만합니다. 오늘 옛 현자 다산의 가르침도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조급하고 허망한 말을 피해야 마음이 고요해진다. 엄정한 말과 평안한 마음이 어우러질 때 덕은 완성된다.” “대개 겉과 속을 함께 닦아야 그 덕이 외롭지 않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말을 해서는 안된다.”<다산;심경밀험>
바티칸 교황청의 홈페이지 레오 교황의 말씀도 어둔 세상을 비추는 빛처럼 반갑고 고맙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영성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레오 교황이요 참으로 기도하도록 우리 마음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은 결코 지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람들은 인내와 신뢰를 배우도록 불림받았다:‘하느님의 시간은 언제나 완전하다(God’time is always perfect).’” “참 신자의 증거는 겸손함과 자유로움이다.” “하느님은 세례를 통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느님은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했으나, 그분은 우리 없이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분은 충실과 신뢰, 그리고 감사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믿는 이들을 부르신다.”
레오 교황의 11월27-12,2일까지 튀르기에와 레바논 제1차 해외 사목여행을 앞둔 교황청 관계자의 언급도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그분의 방문이 평화의 숨결이 되고 우리 모두의 쇄신의 계기가 되기를 참으로 희망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의 존엄을 위한 정의와 존경, 대화를 통한 평화보다 인간에게 다른 길이 없음을 인정한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가 답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고 겸손한, 단순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 그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어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기도입니다. 평생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배우고 실천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오늘로 짧은 요나서는 끝납니다. 전 요나서는 “요나가 주님을 피하여 달아나다-요나가 회개하고 살아나다-요나가 니네베로 가다”에 이어 오늘 주제인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자애를 깨우쳐주시다.”로 끝납니다. 요나의 전삶이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따라 전개됨을 봅니다. 분명 우리의 삶도 분명 그러할 것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은 결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하나가 <신의 한 수> 같은 불림받은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요나서가 흡사 하느님과 요나의 끝없는 줄다리기 싸움같습니다. 요나가 도망가도 끝내 잡아내고 맙니다. 하느님 수중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요나입니다. 요나를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이기적 편협한 마음을 넓혀가면서 하느님의 자애를 깨닫도록 일깨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느님일뿐 아니라 모든 죄많은 이민족들의 하느님이심을 일깨웁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선포했지만 내심 이들의 심판과 멸망을 바랬든데 이것이 이뤄지지 않자,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심통을 부리는 요나가 너무 인간적입니다. 이런 부정적 믿음의 특권의식은 원죄처럼 우리 믿는 이들의 보편적 정서이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아주까리 예화를 통해 요나를 깨우쳐 주는 하느님의 유머스런 교육이 참 멋지고 재미있어 저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요나서의 결론같은 요나를 향한 마지막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 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요나는 물론이고 이 말씀을 접하는 모든 이들을 회개로 각성케 하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부단히 회개와 배움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평생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바로 이를 위해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필요해서, 아쉬워서, 참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 공부하는 마음으로 바치고 실천해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나의 신원을, 정체성을 날로 깊이 자각케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추상적 종교나 철학의 하느님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의 아버지입니다. 모든 인류의 아버지이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평등한 자녀가 되고, 서로간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신 한가족의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이런 삶의 중심인 아버지를 향할 때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도록 기도함과 더불어 우리의 협조의 응답이 필수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또 하느님의 나라가 임재하시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회개와 더불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함과 더불어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에 앞서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것이며,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과 더불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결코 우리의 일방적 무책임한 청원이 아니라 우리의 적극적 협력을 통해 완성되는 주님의 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와 각오로 바쳐야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우리의 실존 상황을 거울처럼 환히 비춰주는 성서의 요약과 같은 주님의 기도요, 주님을 날로 닮아가면서 참나를,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삶에서 <주님의 기도>가 현실화 되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시편86,5).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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