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슬로우 묵상] 아름다운 무덤, 침묵하는 양심 -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작성자서하 쪽지 캡슐 작성일2025-10-15 조회수42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 28 주간 목요일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루카 11.47


아름다운 무덤, 침묵하는 양심


지난달 나는 그리운 분의 묘소에 다녀왔다. 무덤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사람의 손길이 오래 닿지 않은 듯 고요했다. 나는 그 앞에 앉아 오랜만에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덤 앞에서의 나는 언제나 정성스럽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그 경건한 마음에 숨은 위선을 드러내신다.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 순간, 우리는 과연 예언자를 기억하는가, 아니면 우리의 양심을 잠재우고 있는가?

 

율법학자들은 예언자들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그들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겉모습 너머의 진실을 꿰뚫어보신다. 만약 그 예언자들이 지금 살아 있다면, 바로 그들이 가장 먼저 돌을 들었을 것이다. 이것은 '안전한 기억'과 '불편한 현실' 사이의 간극이다. 죽은 예언자는 더 이상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의 말씀은 책 속에 고요히 잠들어 있고, 그의 도전은 역사 속에 묻혀 있다. 우리는 그를 '성인'이라 부르며, 동시에 그의 목소리를 침묵시킨다.


나 역시 안전한 거리에서 성인들을 사랑해왔다. 마틴 루터 킹을 존경하면서 내 주변의 차별에는 눈을 감았다. 마더 테레사를 사랑하면서, 가난한 이웃은 외면한 기억이 떠오른다.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글을 읽으며 설레이면서 정작 내 마음의 어둠은 직면하지 못했다. 나는 성인들의 책을 읽고, 명언을 인용하고, 축일을 기념한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있다면, 그들이 내 삶에 구체적으로 말을 건넨다면,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따를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누구의 무덤을 짓고 있는 것일까. 무덤은 기억의 자리이지만, 동시에 회피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는 그 앞에서 슬퍼하면서, 스스로의 안일을 합리화하고 있진 않을까...

 

살아있는 예언자는 불편하다. 예언자는 언제나 체제의 언어를 거부하고, 안락한 신앙의 잠을 깨운다. 성전 앞에서 외치고, 권력자들의 잔치에 냉수를 끼얹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과격하다', '극단적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옳았음이 드러난다. 그제야 사람들은 그의 무덤을 세우고 '선구자'라 부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예언자를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곁에서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를.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제도의 바깥에서, 권력의 주변에서 들려온다. 그 목소리는 웅장하지 않고, 때로는 눈물처럼 약하다. 가난한 이의 탄식 속에서, 소외된 이의 침묵 속에서, 고통받는 피조물의 신음 속에서.

우리가 '불편하다', '극단적이다'며 외면하는 그 외침이, 후세에는 '용기 있는 증언'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이 반복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신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은 단지 과거의 죄를 묻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여전히 예언자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면서, 정작 그들의 정신을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율법학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를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예언자를 죽이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무덤을 세우며 자신들은 다르다고 믿고 있는 바로 그 착각이, 그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예언자 예수님마저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나를 무덤이 아닌 살아있는 관계 속으로 초대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 내게 울리는 부름이다. 율법은 지식을 지키지만, 복음은 생명을 연다.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문은 해석의 정교함이 아니라, 사랑의 체험으로 열린다. 머리의 동의가 아니라, 발의 순종으로 열린다.

 

예수님은 오늘 나에게 물으신다.

 

너는 무덤 앞에 서 있느냐, 아니면 살아있는 나를 만나고 있느냐?

 

진정한 신앙은 과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것이다. 아름다운 무덤이 아니라, 불편한 만남을 선택하는 것이다. 안전한 추모가 아니라, 위험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언자의 무덤 앞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태그 슬로우묵상, 서하의노래, 무덤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