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0월 17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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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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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17 | 조회수47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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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 신부님_ 예전에 해외로 성지순례 갔다가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신자들과 함께 해외 성지순례 중이었는데, 가이드가 신자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순례지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은 분명히 확인했는데, 워낙 사람이 많은 곳이어서 다른 순례팀에 휩쓸려 가신 것 같다고 합니다. 연세가 꽤 있으신 분이어서 더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이드와 저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그분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은 너무 쉽게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요?
어느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드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 일행을 잃어서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마침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어서 아이스크림 먹으며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십니다.
현명하신 분이었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되면 당황해서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시거든요. 그래서 서로 길을 엇갈려서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찾으러 오겠지.’라는 믿음에 자리를 지켜 주시니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살면서 길을 잃었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잠시 멈춰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곳에 가지 않고 제대로 목적지를 향해 갈 수 있게 됩니다. 멈춰서 우리의 안내자이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문제는 주님보다 다른 것에 믿음을 둔다는 것이지요.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루카 12,1.2)
예수님께서는 이제 잘못된 종교 지도자를 따라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십니다. 먼저 누룩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반죽 전체를 부풀어 오르게 하고 그 성질을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이 바로 이 누룩과 같다는 것입니다. 위선은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작은 생각이나 행동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그 사람의 신앙과 삶 전체를 부패시키고 본질을 잃게 만드는 무서운 힘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12,4.5)
세상의 권력자들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체적 생명을 앗아갈 뿐,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따라서 창조주이자 심판자이신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도 모두 알고 계시며 깊은 사랑으로 돌보고 계십니다.
위선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사랑에 신뢰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어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서 참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자부심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킨다(스티브 룬드퀴스트).
김건태 신부님_바리사이들의 누룩
예수님은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겨냥한 불행 선언을 마치시고, 이제 제자들만을 대상으로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불행 선언이 결국 제자들을 위한 또 다른 차원의 가르침임을 예견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로, 유다교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이 지상교회의 종교 지도자로 역할을 다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할 것”을 이르십니다. 바리사이들의 위선은 하느님과 이웃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형식적 행위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와 같은 행위를 경계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마음속 깊이 숨겨진 성향들은 말과 행동을 통하여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위선은 언젠가 벗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진리와 대충 타협하려는 온갖 시도는 일찌감치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제자들은 또한 신앙을 고백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하여 고민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증언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울려 퍼져야 합니다. 동굴이든 지하 묘지이든, 연회실이든 사무실이든, 감옥이든 병영이든 진리를 위한 증언은 모두 밝은 데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 무엇도 이 증언이 한낮에 울려 퍼지는 것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 모두 밝은 데에서 들을 것이다. .....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제자들은 분명 예언자들처럼 목숨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면, 죽음 따위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을 주실 능력을 지니신 분이기에,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 보다 더 두려워해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의 두려움을 다른 두려움과 대립시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미소한 피조물까지도 잊지 않으시며 헤아리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 사랑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살아야 하며, 그 믿음으로 주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모든 벗, 사도들을 기초 삼아 세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교회 구성원들은 마땅히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이나 세속적인 인간관계 때문에 세상과 타협하거나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모든 신앙인은 늘 하느님의 시선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하루, 머리카락 까지도 세어 두실 정도로 우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보듬으시며 따뜻한 시선으로 돌보아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두려움 없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실천하는, 활기찬 신앙인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신부님_ 너희가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먼저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누룩은 작은 것 같지만 온 반죽을 부풀게 하듯이, 위선은 작아 보이지만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한다.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지만, 속은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는 삶, 그것이 바리사이들의 모습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도 이 위선에 물들지 않도록 경고하신다.
이어서 주님은 두려움의 방향을 새롭게 가리키신다. “육신을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지옥에 던질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4-5절) 즉,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단순히 벌을 받을까? 무서워하는 공포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저버릴까? 두려워하는 경외심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In Psalmos 111)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답게 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주님은 곧바로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하나도 하느님께서 잊고 계시지 않는다. … 너희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6-7절) 참새조차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절대 잊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구절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머리카락까지 세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세밀히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불신앙이다.”(Homilia in Matthaeum 34)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두려움—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세상의 두려움은 작아지고, 우리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사람의 눈치를 더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서의 진실을 더 두려워하는가? 나는 위선의 누룩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 속에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면, 머리카락 하나도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담대히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전삼용 신부님_ 언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두려움과 마주합니다. 미래, 실패, 사람들의 시선, 그리고 홀로 남겨질지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까지. 이 두려움은 마치 우리를 옭아매는 사슬과 같아서, 우리를 위선적으로 만들고 거짓말을 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두려움의 본질을 꿰뚫어 보시고,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아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머리카락까지도 모두 세어 놓았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루카 12,6-7)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보호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찮은 참새 한 마리조차도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는데, 하물며 그분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우리를 돌보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안의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언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 그 답은 바로 "두려워하지 않기로 결심한 순간부터"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어서 생깁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우리 안에 싹트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중요한 관계는 '믿음의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결혼을 예로 들어 봅시다. 배우자를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진정한 결혼 생활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안 믿으려는 사람은 결혼해서도 의처증이나 의부증에 시달립니다. 아무리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아무리 충실한 모습을 보아도, 결국은 불신과 두려움에 갇혀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려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약해 보일까 봐, 세상에 잡아먹힐까 봐, 혹은 사랑받지 못할까 봐 거짓말을 하고 자신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마치 멧돼지가 발에 가시가 박혀도 절뚝거리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글에서는 약하게 보이면 바로 사냥감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바로 이런 위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보호를 믿기로 결심하지 않았기에, 끊임없이 자신을 위장하고 두려움에 갇혀 살았습니다.
여기,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두려움 때문에 평생 위선적이고 경쟁적인 삶을 살았던 한 중년 남성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 이무석 교수의 책 '삼십년 만의 휴식'에 나오는 실제 상담 사례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늘 불안과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끊임없이 남들과 경쟁하며 이기려 했고,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자신을 혹사했습니다. 그의 불행의 근원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평생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이나 인정의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늘 비판과 냉대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그 노력이 사회적인 성공으로 이어졌지만,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버지에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지독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이 그를 위선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겉으로는 강하고 능력 있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늘 비난받을까 봐 전전긍긍했고, 자신의 약점을 숨기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했습니다.
상담 과정에서 그는 마침내 이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했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그에게 아버지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보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라고 조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더 이상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버지를 용서하고, 오히려 그 역시도 사랑받지 못했던 불쌍한 존재였음을 이해하고 불쌍히 여기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이 '결심'은 그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무석 교수는 그의 꿈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를 용서한 뒤 그가 꾼 꿈에서, 예전에는 늘 엄하고 거대했던 아버지가 소파 위에 있는 작은 강아지처럼 보였다고 했습니다." 이 상징적인 꿈은 그가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었음을 보여줍니다. 이 결심과 함께 그의 내면에서 '믿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인정을 구하지 않아도 자신이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치유되어 30년 만에 비로소 '휴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위선적인 삶은 막을 내렸고, 그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이야기들 속에서 "언제 두려움이 사라지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입니다.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증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근원적인 필요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기로 결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위선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참된 평화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의 큰형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릴 적 밤마다 극심한 가위눌림이라는 어둠의 세력에 시달렸던 형님은, 스스로 강해지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이제는 주님께 나를 온전히 맡기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성호를 긋고 자신을 주님께 의탁하는 '믿음의 결단'을 내렸고, 그 순간부터 하느님의 보호가 임하며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어둠의 세력과 싸우며 강한 척 살지 않아도 되는, 참된 평화를 얻었습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어서 옵니다. 그런데 믿음은 믿기로 결심할 때 생깁니다.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그냥 주님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기로 결심하면 됩니다. 그 순간, 두려움은 사라지고 참된 믿음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위선을 조심하여라."(루카12,1)
'고진감래의 삶(신앙)!'
오늘 복음(루카12,1-7)은 '바리사이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고생 끝에 낙(기쁨)이 온다.'는 '고진감래'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는 체험된 삶의 지혜이며, 우리의 삶을 대변해 줍니다. 곧 '거져 주어지는 것, 그냥 주어지는 것이 없다.'는 것이고,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것은 '수고와 땀의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요즘 뜨거운 뉴스로 계속 보도되고 있는 캄보디아 소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바로 '고진감래의 메시지'입니다. '쉽게 돈 벌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이고, 때문에 '쉽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그런 유혹과 가짜 뉴스를 경계해야 하고, 그것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사이들의 누룩, 곧 그들의 위선과 가짜를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박해와 시련을 견디어 내라고 하십니다.
'믿는 이들의 삶도 고진감래의 삶(신앙)'입니다. 믿는 이들의 목적인 생명과 부활은 거져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는 분명한 표지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생명과 부활의 대전제는 십자가'입니다. 그 너머에 생명과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몸소 가르쳐 주신 '진리'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라간 수많은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진리'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12,4.5)
"주님, 세상을 떠난 한영희(막달레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 2사무24,25)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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