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탐욕과 재물에 대한 경계를 가르치신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15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금전적 경계가 아니라, 인간 생명과 참된 가치가 재물에 좌우되지 않음을 아는 영적 통찰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는 자신의 재산에 집착하며, 가난한 이들을 돌아보지 못했다. 그는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다.”며 자기만을 위해 계획했다. 이는 바오로 사도가 말한 ‘세상 것에 마음을 두는 삶’(콜로 3,2)과 대비된다. 인간의 삶과 참된 안전은 하느님 안에서 보장되며, 재물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도구로 사용될 때만 의미를 가진다.
교부들은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재물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마음을 두고 하느님보다 그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죄다.”(De Civitate Dei, XIX, 19) 토마스 아퀴나스는 “재물은 자연스럽게 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가난한 자와 필요한 이를 돕는 것이 참된 지혜”라고 말한다.(Summa Theologiae, II-II, q.118)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리하여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는 말씀은 단순한 물질적 나눔을 넘어, 덕행과 자비,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늘의 보화를 쌓으라는 권고이다. 재물은 하늘나라에서의 보증금이 될 수 있으며, 선행과 자선은 영원히 남는 참된 재산이 된다.
오늘 복음을 통해 묵상할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재물을 나 자신과 쾌락을 위해만 쓰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내 마음은 재물보다 덕과 사랑, 정의를 우선시하고 있는가? 죽은 후에도 나를 따라오는 선행과 자비를 쌓고 있는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참으로 부유한 사람은 재물을 하늘나라의 친구로 삼아 덕과 사랑의 길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과 선택을 성찰하며, 재물을 통해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돕는 참된 지혜를 실천해야 한다.
전삼용 신부님_가끔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하게 들리는 이유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참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 제 형에게 분부하시어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게 해 주십시오." 하고 요청합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형이 동생의 몫까지 독차지한, 아주 부정의한 상황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정의의 편이신 예수님께서 "이 녀석아, 동생에게 당장 유산을 내놓아라!" 하고
호통치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황당합니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하시며 거절하시고는, 뜬금없이 "너희는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하고 훈계하십니다.
아니,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시는 게 예수님이 하실 일이 아닙니까?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앞장서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 어딘가 이상하고 황당하게 들리지 않으십니까?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이 황당하게 들린다면, 그건 우리가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는 환경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에게 "여보게, 안식일이니 좀 쉬었다가 허우적거리게나." 하면 그 말이 들리겠습니까?
사람은 두 가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누구는 '동산'에서 살고, 누구는 '정글'에서 삽니다.
에덴동산에 나타났던 뱀의 말을 믿으면, 우리는 정글에서 살게 됩니다.
"하느님은 믿을 수 없어. 네 힘으로 살아남아야 해." 이 거짓말이 우리를 정글로 내몹니다.
정글에 사는 존재들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습니다.
자신을 감추고, 속이고, 진실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야생의 멧돼지는 다리에 가시가 박혀도 절대 절뚝거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절뚝거리는 순간, 약점이 노출되어 바로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정글에서는 이처럼 늘 긴장하고, 경계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이 갖고, 더 강해져야만 합니다.
바로 이 정글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 나온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유산은 생존의 문제였고, 예수님은 그 생존 문제를 해결해 줄 힘 있는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탐욕을 경계하여라. 재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고 하시니, 얼마나 황당하게 들렸겠습니까?
프랑스의 장클로드 로망이라는 사람은 18년 동안 세계보건기구(WHO)의 저명한 의사 행세를
했습니다.
그는 의대 시험에 낙방한 뒤,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대한 거짓의 성을 쌓아 올렸습니다.
18년간 그는 단 하루도 마음 편히 잠들지 못했습니다.
언제 거짓이 들통날까 봐, 약점을 잡힐까 봐, 정글의 멧돼지처럼 늘 긴장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거짓이 탄로 날 위기에 처하자, 그는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아내와 두 자녀, 그리고 부모님까지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비극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없는 정글에서, 거짓의 옷을 입고 생존하려 발버둥 치는 인간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냉전 시절 주한미군 병사였던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의 삶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부대에서 잦은 말썽을 부리다 군사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 그 처벌이라는 진실을 마주하는 대신 비무장지대를 넘어 북한으로 망명하는 거짓의 길을 택했습니다.
장클로드 로망처럼, 드레스녹 또한 자신의 작은 거짓을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거짓의 체제라는
더 큰 거짓으로 덮으려 한 것입니다.
그는 잠시의 위기는 모면했을지 몰라도, 남은 평생을 '위대한 수령 동지께 충성하는 미제 귀순용사'라는 거짓된 역할을 연기하며 더 지독한 정글의 감옥에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동산'에서 말씀하십니다. 동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생존'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이것만 하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은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 동산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동산에 사는 사람에게 유산 다툼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바로 이 동산의 관점에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얘야, 그런 건 아버지가 다 채워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너는 그저 형제와 사랑하며 잘 지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정글에서 나와 동산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정글로 들어가는 문이 '거짓'이었다면, 동산으로 들어가는 문은 '진실'입니다.
나를 가리던 나뭇잎 옷을 벗어 던지는 것입니다.
이 진실의 문으로 들어간 대표적인 성인이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입니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느 날, 아버지와 도시의 주교, 수많은 군중 앞에서 자신이 입고 있던 화려한 옷을 모두 벗어 던졌습니다.
완전히 벌거벗은 채, 그는 세상의 모든 거짓과 허영을 상징하는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며 선언했습니다.
"이제부터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한 분만을 모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생존하려 했던 정글의 삶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돌보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동산의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바로 그 진실의 순간, 모든 것을 벗어 던진 그 순간, 그는 비로소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폐허가 된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가는 내 집을 고쳐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말입니다.
진실하게 자신을 벗어 던졌을 때, 그는 주님의 뜻을 알아듣게 되었고, 무너진 성당을 벽돌 한 장 한 장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탐욕과 위선으로 무너져가던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 전체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위대한 성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관계 맺는 법'을 가르쳐주는 학교입니다.
이 학교를 졸업해서,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관계 지향적인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예수님 곁에서 3년이나 따라다녔던 가리옷 유다처럼 말씀을 돈주머니 채우는 수단으로만 여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진리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절대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동산으로 이끄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어떤 환경에 서 있습니까?
여전히 거짓의 나뭇잎으로 나를 가린 채,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정글에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진실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동산에서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를 옭아매는 거짓의 옷을 벗어 던지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진실의 문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동산으로 들어갑시다.
그럴 때, 황당하게만 들렸던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들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루카12,15)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오늘 복음(루카12,13-21)은 '탐욕을 조심하여라'는 말씀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루카12,15)
그리고 큰 탐욕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12,20)
만족을 모르면서, 나누지 않으면서, 더 가지고 싶어하고, 더 쌓아두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오늘 복음이 큰 경종을 울리는 말씀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탐욕'은 필요 이상으로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입니다. 이 욕심이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가정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탐욕은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우상숭배'입니다.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는 말씀이 이미 세상을 떠난 재벌들의 모습을 통해 확인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탐욕은 가장 경계해야 할 '죄'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마태25,31-46)'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사랑 실천은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작은 곳과 낮은 곳에 있는 이들에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부유하지 못한 사람'은 '남에게 베풀 줄 모르는 사람, 특히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쌓아둔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사랑 실천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방법대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천국)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위해 날마다 최선을 다합시다!
(~ 1열왕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