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5,12.15ㄴ.17-19. 20ㄴ-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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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종업로마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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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21 | 조회수19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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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화요일 제1독서 (로마5,12.15ㄴ.17-19. 20ㄴ-21)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18)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19)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0)
로마서 5장 18절과 19절은 아담과 그리스도께서 각각 자기에게 속한 자들과 영적으로 일치된 영적 대표로서, 그들의 행위의 결과가 자신에게 속한 자들에게 전가됨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이 전가는 신학적으로 대표와 연대에 따른 죄의 책임과 의로움의 전가라고 할 수 있다. 즉 아담의 행위는 모든 사람을 유죄 판결을 받게 한 반면, 그리스도의 행위는 많은 이를 의로움과 생명에 이르게 한 점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다.
로마서 5장 18절에서 '모든 사람'으로 두 번씩이나 사용된 '판타스 안트로푸스' (pantas anthropus)는 '모든 사람들'(all men)이란 뜻이다. 즉 '판타스'(pantas)는 '많은'(many)이 아니라 '모든'(all)이란 형용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판타스 안트로푸스'는 '아담 아래 있는 모든 사람'과 '그리스도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며, 전자는 아담의 육적인 혈통 아래 있는 전인류를 가리키며, 후자는 그리스도의 영적인 혈통 아래에 있어서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1코린5,22).
한편,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행위를 '범죄'로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의 행위는 '의로운 행위'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아버지 하느님께 바치신 의로운 순종 즉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가리킨다.
그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필리2,6-8).
이것이 예수님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해 취하신 행위의 전부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통해 의롭게 되어 생명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이 취하신 행동은 아담의 그것과 전혀 대조적이다.
아담은 일개 피조물로서 교만과 불순종으로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그분과 같이 되려 하였으나(창세3,5)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느님이심에도(요한1,1-3) 겸손과 순명으로 자신을 낮추시어 사람으로 오셨고(요한1,14), 자원으로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따르셨다(요한10,18; 마태26,39).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행위가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의 신분과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분의 '의로운 행위'(디카이오마; dikaioma)가 우리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의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로마서 5장 19절은 아담의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순종이 인류에게 미친 영향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먼저 '되었듯이'로 번역된 '호스페르 ~카테스타테산'(hosper~katestathesan)에서 동사 '카테스타테산'은 '~이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카티스테미'(kathistemi)의 부정 과거 수동태 3인칭 복수형이다.
이것은 대표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의 범주에 들어갔고, 죄인의 신분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한다.
이런 원리는 '될 것입니다'는 표현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될 것입니다'로 번역된 '카타스타테손타이'(katastathesontai)는 '카티스테미'(kathistemi)의 미래 수동태 3인칭 복수형으로서 법적인 신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실제 상태에서도 의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대표와 연대의 원리에 의해서 많은 사람이 법적인 신분에서 의인이 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유기적 관계로 말미암아 의인의 범주 및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사도 바오로는 아담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행위의 결과를 모두 동사 '카티스테미'(kathistemi)로 나타내는데, 아담에 대해서는 부정 과거 수동태로서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단번에' 그리고 '이미' 죄인의 상태에 들게 되었음을 나타내는 반면에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미래 수동태로 표현해 많은 사람이 그분을 통해 계속해서 의롭게 될 것을 시사한다.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20)
어두움이 깊을수록 그 가운데 비치는 빛은 더 밝아 보이듯이, 죄가 더 많아지고 많이 드러날수록 하느님의 용서의 은혜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즉 하느님의 인류를 향하신 은총은 언제나 풍성하고 변함이 없지만, 인간의 죄가 더 많아지고 죄의 책임이 더 커질수록, 그 은총의 풍성함 또한 더욱더 커보인다는 말이다.
여기서 '충만히 내렸습니다'로 번역된 '휘페레페릿슈센'(hypereperisseusen)의 원형 '휘페스페릿슈오'(hyperperisseuo)는 최상급의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즉 '양을 초과하다', '넘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페릿슈오'(perisseuo)에 '~을 초과하는'(more than; beyond; over)의 의미를 지닌 접두어 '휘페르'(hyper)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이 동사는 더 이상 넘쳐흐를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른 풍성한 상태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죄의 무게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고 놀라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죄가 바닷가에 산더미처럼 쌓아올린 모랫더미에 비유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리스도의 은총이라는 밀물이 파도가 되어 밀려오면 순식간에 다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용서하실 수 없을 정도로 큰 죄가 없으며, 동시에 하느님의 은총없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는 의인 또한 없는 것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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