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송영진 신부님_<주님께서 지금 문을 두드리시니 지금 열어 드려야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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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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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21 | 조회수31 | 추천수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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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 12,35-38)”
1) 이 말씀은, 종말과 재림에 대비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종말과 재림에 잘 대비한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참되고 영원하고 큰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금(오늘)’에 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안식처로 들어갑니다. 안식처는 물론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이미 다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곳에 들어갈 기회가 아직 있고, 또 예전에 기쁜 소식을 들은 이들은 순종하지 않은 탓으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였기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오늘’이라는 날을 정하셨습니다. 앞서 인용한 대로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다윗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그분의 소리를 듣거든 마음을 완고하게 갖지 마라.’ 하고 말씀하실 때에 그리하신 것입니다(히브 4,3ㄱ.ㄹ.6-7).” 메시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주님이신 분이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지금 나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듣고, 믿고,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은, 즉 신앙생활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나간 ‘어제’는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종말과 재림에 잘 대비하는 일을 ‘지금’ 해야 하는 것인데, 이 가르침은, ‘지금’이라는 시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 문을 두드린다는 말에서, 묵시록 3장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19-20).” ‘깨어 있음’은 곧 ‘회개’입니다.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중이라면, 그 길을 버리고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이 회개이고, 지금 올바른 길을 잘 가고 있다면,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잘 하고 있다면, 계속 꾸준히 잘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죄인들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복음 말씀에는 문을 두드리는 일이 ‘곧 일어날 일’로 표현되어 있고, 묵시록에는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표현이 앞뒤가 안 맞는 것으로, 또는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복음에 있는 말씀은 ‘재림’에 초점을 맞춘 말씀이고, 묵시록은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재림은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기다려야 하는 일’인데, 깨어 있으면서 기다리는 일, 즉 신앙생활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뜻을 생각하면, 복음 말씀과 묵시록의 말씀은 사실은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내 영혼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기 때문에, 문을 열어 드리는 것도 ‘지금’ 해야 하는 일이고, 오신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도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나중’이란 없습니다.>
3) 주인이 종들을 식탁에 앉히고 시중을 들 것이라는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크고 영원하고 참된 행복’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 행복과 기쁨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당시 사람들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표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묵시 3,21).” 주님께서 충실한 신앙인을 위해서 시중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충실한 신앙인을 당신의 어좌에 함께 앉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누리고 계시는 영광과 영예를 함께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창조 이전부터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시어 저에게 주신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요한 17,24).” <여기서 “영광을 그들도 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누리고 계시는 영광을 충실한 신앙인들도 함께 누리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뜻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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