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0월 24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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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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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24 | 조회수45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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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회개의 삶
우리 인간에게 주신 천주 성령의 가장 큰 선물 가운데 하나는 판단력 또는 분별력입니다. 세상의 일에 관하여 사람들은 어떤 상황을 판단하고 위험 수위를 측정하며 그에 걸맞은 행동을 결정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자랑할 때가 참 많습니다. 사실 자랑할 만도 합니다. 예수님이 군중에게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하고 개탄하시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 이 판단력 행사가 필요한 곳은 세상일이 아니라, 이 시대, 곧 요한 세례자가 예고했고 예수님이 몸소 하느님의 능력을 표징으로 보여주시며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고 있는 이 시대에 관한 일입니다: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가장 귀가 어두운 사람은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걸어가야 할 올바른 길을 판단하는 일에서, 문제는 듣기를 마다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이나 충고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내부의 소리, 양심의 소리는 들어야 하는 데도 말입니다. 이런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양심이 일러주는 그 길이 마음에 내키지 않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잘못된 의식을 전환하고, 몸에 밴 귀한 버릇을 포기하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성실하지 못했음을 반성하는 일을 가리킬 것입니다. 마음을 바꾸어 양심의 소리만은 따르겠다는 결심을 앞세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귀가 어두운 사람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각각의 세대는 결정적인 시대를 살고 있으며, 우리의 미래는 이 시대에 관한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분은 오늘 우리가 겪어야 할 사건들과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우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들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절박한 부르심, 사랑 실천을 독려하는 간절한 부르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너무나 자주 듣기를 마다하여 어두운 귀를 들이대거나 자랑하는 무례를 범할 때가 많았음을 반성하며,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일례로 소개하시는 장소는 준엄하기로 이름났던 로마 법정입니다. 한번 소송이 펼쳐지면, 그 과정이 가혹하기 이를 데 없던 법정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법정의 이 냉혹한 현실을 상기시키시면서, 재판관 앞에 서기 전에 합의를 봄으로써 최악을 모면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이 권고를 통해서 예수님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수도 있는” 최후의 심판 날에도 두려움이나 초조함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회개의 길을 걸어갈 것을 독려하십니다. 따라서 너무 늦지 않도록 회개를 결심해야 합니다. 무자비한 판관으로서의 주님이 아니라, 한없이 자비로우신 판관으로서의 주님을 뵙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결단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망설일 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하고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하루,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선물로 내려주신 판단력을 기초 삼아, 회개만이 준엄한 징벌을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슴에 새기며, 등 돌린 삶에서 주님을 향해 다시 돌아서 신앙의 길을 망설임 없이 걸어나가는, 은혜로운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
복음: 루카 12,54-59: “법정으로 가는 길에서 화해하도록 힘써라.”
사람은 날씨의 변화를 보며 내일 비가 올지, 바람이 불지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세상의 징표는 읽을 줄 알면서 정작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주시는 구원의 징표는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죽음과 심판 이전에 회개하고 화해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일깨워 준다.
예수님은 “너를 고소한 자와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58절) 하신다. 여기서 ‘재판관’은 종말에 우리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우리는 모두 죄인으로서, 살아있는 동안에야만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죄의 빚을 탕감받을 수 있다.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고, “마지막 한 닢까지”(59절) 갚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이 구원의 때이며, 회개와 화해의 시간이 지금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은 자비의 시기이고, 회개의 시간이지만, 심판이 시작되면 은총의 문은 닫히고, 각자는 자기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De Lapsis, 28) 성 아우구스티노 역시 우리를 일깨운다: “오늘은 네가 고쳐야 할 날이다. 내일은 아직 네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내일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늘을 주셨을 뿐이다.”(Sermones, 169, 15) 또한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지상 생애가 끝나면 우리는 단 한 번의 죽음을 겪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이때 각자는 자기 삶을 책임지며,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따라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게 된다.”(1021항 참조)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빚’을 지고 산다. 하느님께 지은 죄, 이웃에게 지은 잘못, 마음속에 남은 분노와 미움….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의 길, 화해의 길을 열어 주신다. 고해성사를 통해, 또 서로에게 용서를 청함으로써 우리는 빚을 탕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나중에 하지” 하고 미루다 보면, 마지막 순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을 수 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간절히 요청한다. 아직 살아 있을 때 화해하라.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용서를 청하라.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주님의 자비를 붙잡아라.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때이다.
우리는 모두 법정으로 가는 길 위에 서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화해와 회개의 시간을 주신다. 이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말고, 주님의 자비로 우리 영혼을 깨끗이 하며,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자. 그럴 때, 우리는 재판관이신 주님 앞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긴급한 경고를 하십니다. “네가 고소인과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너는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은 마치 한 편의 법정 드라마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길을 걸어 마지막 재판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여정에 ‘고소인’이 동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고소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를 고소하는 자는 누구이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흔히 고소인이라 하면, 묵시록에 나오는 ‘악마’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고소인이 악마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소인은 재판관의 편에 서서 정의를 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이 하느님이시라면, 고소인 역시 하느님의 편에 선 존재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정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심어두신 ‘양심’ 이며,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기 위해 주신 ‘거룩한 법’ 입니다. 결국 우리를 고소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내 안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입니다.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는 이 진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을 가장 두렵게 한 것은 형 에사우의 군대였지만, 정작 그의 발목을 잡고 머뭇거리게 만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양심’이었습니다. ‘나는 형을 속이고 얻은 이 장자권을 가지고 과연 합당하게 살았는가?’ 이 양심의 고소가 야곱을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했습니다. 그가 이 고소와 화해하는 방법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야뽁 강가에서 정체 모를 존재, 즉 하느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하다가 마침내 엉덩이뼈가 부러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힘과 교만, 잔꾀를 상징하는 뼈가 부서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릴 수 있었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자신을 고소하던 양심의 실체인 형 에사우를 만납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완전히 부서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 앞에서 땅에 일곱 번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마침내 형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양심의 고소는 우리를 벌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교만을 부수고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게 하려는 그분의 초대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양심의 소리를 외면할 때, 그것은 우리 영혼을 가두는 가장 끔찍한 감옥이 됩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를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비범함을 증명하기 위해 전당포 노파를 도끼로 살해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순간부터 그의 양심이 그를 고소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경찰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쫓깁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사람들의 모든 눈길과 대화가 자신을 고발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의 방은 문자 그대로 감옥이 되고, 그의 삶은 지옥이 됩니다. 결국 그는 이 양심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구원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처럼 우리를 고소하는 양심과의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 길을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닭이 울었을 때, 그의 양심은 그 어떤 칼보다도 날카롭게 그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그런 그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화해의 본질을 깨달아야 합니다. 양심과의 화해는 ‘주님, 다시는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교만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주님, 저는 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함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참된 화해는, 그런 나약한 나를 아시면서도 당신 아드님의 피로 나의 죄를 언제나 기꺼이 씻어주시는 주님의 무한한 자비에 의탁하며, 눈물로 그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그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야곱처럼 땅에 일곱 번 엎드려 나의 죄와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내 이웃 안에서 발견하며, 그분을 찬미할 수 있는 상태, 그것이 바로 의로움입니다.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턴이 ‘나 같은 비참한 죄인 살리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을 노래했던 것처럼, 나의 죄가 클수록 그분의 자비는 더욱 놀랍게 빛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고소인, 즉 율법과 양심과 완전히 화해했다는 최종적인 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받은 용서를 다른 이들에게 흘려보내는 ‘용서의 실천’입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에바 모제스 코르 여사는 자신을 고문했던 나치 의사를 용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과거의 고통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나를 고소하던 과거의 원한과 상처로부터 나 자신을 풀어주는 마지막 열쇠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나를 고소하는 자는 율법과 양심입니다. 그리고 그와 화해하는 방법은 명확합니다. 첫째, 나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절망하는 대신 나를 용서해주시는 주님의 자비를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그 받은 사랑으로 나의 잘못을 용서하신 주님처럼, 나 또한 다른 이들의 잘못을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용서받고도 용서하지 않는 양심의 가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양심은 정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받은 것은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갈 때, 자비로운 가죽옷을 입은 사랑받는 자녀로 당당히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카12,56)
'이 시대의 의미와 해야 할 일!'
오늘 복음(루카12,54-59)은 '시대를 알아보아라.'는 말씀과 '늦기 전에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날씨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도, 이 시대의 중요성에 대해 둔감한 이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늦기 전에 얼른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세상 것과 세상 이치에는 엄청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것과 하느님의 뜻에는 둔감한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세상 것과 세상 이치에 밝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말이 많고 시끄럽습니다. 드러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것에 대해 관심이 많고, 그 뜻을 따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겸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시대'는 '예수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결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결정적인 시간의 의미를 지닌 '카이로스의 때'입니다.
지금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AI(인공지능)'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표지가 되었습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과 분열의 모습도 보이고, 지금의 미국처럼 자국의 이익만을 바라보는 집단이기주의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리고 또한 심각한 기후변화의 위기도 보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세상이 간과하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꼭 실현되어야 하는 하느님의 것과 하느님의 뜻을 더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의 것과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지구공동체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 존엄성의 실현'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얼른 해야 할 일은 '화해와 회개'입니다.
(~1열왕10,29)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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