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10월 25일 수원 교구청 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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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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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25 | 조회수29 | 추천수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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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3,1-9: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인생의 본질을 묻습니다. “나는 과연 열매를 맺고 있는가?”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며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지만,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는 삶이다. 열매 없는 나무는 결국 잘려 나가듯, 회개 없는 신앙은 죽은 나무와 다름없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희생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의 불행을 언급하시며, 그것이 그들의 특별한 죄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3절)라고 단호하게 경고하신다.
이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에 따른 열매 맺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신다. 무화과나무는 이미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으니, 주인의 심판을 받을 상황이지만, 포도원 관리인은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8절)라고 간청한다. 이 모습은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기회가 영원히 주어지는 것은 아니며, 은총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말한다: “무화과나무는 우리 자신이며, 열매는 회개와 선행이다. 주인은 하느님 아버지요, 중재자는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재를 헛되이 하면 우리는 결국 잘려 나갈 것이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VII, 186)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도 설교에서 권고한다: “하느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우리를 버리려 하심이 아니라, 회개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인내를 방탕과 게으름으로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Homilia in Matthaeum, 43, 2) 교리서도 “회개는 인간의 전 존재, 곧 마음과 행위를 바꾸는 것이다. 그것은 열매를 맺어야 하며, 정의와 사랑과 거룩함 안에서 나타나야 한다.”(1431항 참조)고 한다.
우리 삶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무화과나무와 같다. 주님은 여전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하시며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그 기회를 영원히 미루며 살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회개할 때이고, 사랑의 열매를 맺을 때이다. 작은 기도, 작은 선행, 작은 용서가 바로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이다. 우리가 그 작은 열매를 맺을 때, 주님께서는 더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기를 기다리시는 인내의 하느님이시다. 그러나 기회는 영원히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 지금, 이 순간 회개와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면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운 수확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회개는 내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봉헌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마을에, 이교도 사원과 가톨릭 성당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습니다. 사원의 예배와 성당의 미사는 매일 같은 시간에 있었습니다.
한 마을 이웃에 사는 이교도 신자인 팜푸스와 그리스도인 키루스는 각자의 예배소로 가는 길을 나란히 같은 시간에 걸어가곤 하였습니다.
이교도 신자인 팜푸스는 늘 자기 신을 위하여 바칠 희생제물을 들고 갔었으나 그리스도인 키루스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음이 의아하게 생각되어 어느 날 팜푸스가 물었습니다.
“선생, 당신은 예배하러 가면서 당신 신한테 바칠 제물을 왜 가져가지 않는 거요?”
이 말에 키루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배 드릴 때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바친답니다.“ 라고 말하자 팜푸스는 어리둥절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러한 제물도 가져가지 않았잖소?”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제물을 그분께 바친답니다.” “그럼 과연 무엇을 당신 신께 바친다는 말이요?” 키루스는 대답했습니다. “제 자신입니다.”
물론 자신을 바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소유를 함께 바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바치지 않고 소유물만 바치는 것도 참된 봉헌은 아닙니다.
봉헌은 내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따라서 봉헌 없는 하느님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르면 이웃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하느님께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도 내어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께 무언가 얻어내려는 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도 이웃을 이용하여 무언가 챙기려는 속셈입니다.
봉헌엔 나의 피가 섞여야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에 나의 주인이 되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섞는 것입니다. 감사가 섞이지 않은 제물은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제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빌라도가 갈릴래야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했다는 말을 예수님께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왜 진작 제물이 피를 섞지 않았느냐는 뜻입니다. 회개는 봉헌에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그런데 참다운 봉헌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 봉헌했어야 할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참다운 봉헌은 나의 생명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봉헌은 이웃사랑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실로암은 ‘파견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이웃사랑을 위해 파견 받은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탑’은 ‘교만’을 상징합니다. 교만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했다면 봉헌하고 있을 것이고 봉헌은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봉헌은 주님이 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봉헌으로 돌아오는 것은 성령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 성령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이유는 그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봉헌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면 이웃 사랑의 열매는 맺힐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나의 봉헌이 나를 봉헌하는 것이어야 주님의 계명을 따름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처럼 당신의 천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할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느님으로부터 잘리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인정하여 무슨 뜻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이웃 사랑을 소명으로 여기게 됩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만간’ 주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열정을 접으실 것입니다.
이병우 신부님_"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루카13,3.5)
'회개하는 사람이 되자!'
오늘 복음(루카13,1-9)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말씀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을 통해 '회개의 중요성'과 '회개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먼저 '두 사건'이 언급됩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희생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변을 당한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어서 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서둘러 회개하라는 선언'입니다.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회개'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여정'은 '끊임없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 곧 회개하는 사람과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래서 생명과 평화 안에 머무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사랑과 자비 자체이신 분으로서, 늘 죄인들이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늘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를 더 주십니다.
그런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면서 날마다 회개하는 사람,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됩시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8,5-6)
(~ 1열왕11,1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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