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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카 13,24
좁은 문 앞에서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을 들을 때마다 나는 두려움보다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은 배제의 두려움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인간의 비극에 대한 슬픔이다. 구원은 거절당해서 닫히는 문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종교적 행위를 수행한다. 예배와 미사, 봉사와 기도, 정의를 말하고 생명을 외친다. 그러나 그 안에서 얼마나 자주 우리는 하느님을 '소비'하고 있지 않은가. 기도는 평안의 도구로, 신앙은 정체성의 장식으로 변하고, 복음은 더 이상 나를 태우는 불이 아니라, 내 확신을 덮는 향로의 연기가 되어버렸다.
예수님께서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라고 하신 말씀은 세속의 악인만을 겨냥하지 않는다. 그분은 신앙을 입고 살아가면서도 내면의 회심 없이 '옳음'의 언어로 타인을 심판하는 종교적 자아의 위선을 꿰뚫어 보신다.
나는 요즘 이 땅이 어두워 보인다. 하느님이 주신 생명조차 선택의 권리 아래 놓이고, 가장 연약한 생명은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만삭의 태아까지 낙태할 수 있다는 법안이 논의되는 이 시대에, 나는 좁은 문의 의미를 다시 묻게 된다.
좁은 문처럼, 생명은 좁다. 자궁은 우주보다 작지만 그 안에서 온 우주가 탄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는 '선택의 자유'라는 넓은 문을 열수록, 정작 생명이 통과해야 할 가장 좁고 신성한 문—어머니의 몸—은 닫히고 있다. 우리는 모든 문을 열면서 가장 중요한 문을 잠그고 있다.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향력 있는 자리에 있지만, 세상은 점점 더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정치와 종교의 언어가 '사랑'보다 '논리'로 가득 찰수록 우리의 영혼은 더욱 공허해진다. 아마도 우리는 좁은 문 앞에서 '주님,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습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분은 조용히 대답하실 것이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
하느님이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고 하실 때,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태아의 권리'와 '여성의 권리'를 안다고 말하지만, 정작 생명 그 자체의 신비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법과 권리의 언어로 생명을 다루지만, 생명은 권리 이전에 선물이며, 법 이전에 신비다. 그분은 "나를 안다"라는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세상이 새로워지는가"를 묻고 계신다. 좁은 문은 그분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분의 뜻이 생명으로 태어나는 자리다.
나는 만삭 태아의 낙태를 허용하는 법안을 반대한다. 이 반대는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생명의 신비 앞에서 무릎 꿇는 신앙인의 본능이다. 그러나 동시에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한 번이라도 낙태를 고려한 여성의 절망을 내 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가? 내가 생명을 지킨다고 말할 때, 그것은 태어날 생명만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이미 태어나 고통받는 어머니의 생명도 포함하는가? 좁은 문은 어쩌면, 이 둘을 함께 품으려는 불가능한 사랑의 자리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입장을 넘어서, 생명의 신비 앞에서 떨며 서 있는 자리다.
이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가 필요하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념이 아닌 삶의 실재가 될 때, 비로소 그 문은 열릴 것이다. 지금 세상은 넓은 문을 택하려 한다—편안한 합리와 안전한 중립의 문.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언제나 좁다. 그 좁은 문은 생명을 선택하는 양심의 문이며, 정의와 자비가 하나로 만나야 하는 고통의 문이다. 그 문은 작고 낮지만, 그곳을 통과할 때 우리의 존재는 다시 태어난다.
예수님은 좁은 문에 대해 말씀하시면서도, 동시에 "동서남북에서 오는 사람들"을 환대하셨다. 그분의 심장에는 예언자의 불과 목자의 자비가 함께 뛰고 있었다. 그분은 생명을 지키는 일이 단순한 도덕적 선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사랑임을 몸소 보여주셨다.
좁은 문은 닫힌 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좁아진 하느님의 자궁이 아닐까. 그 좁아짐은 생명을 내어주는 고통이자, 창조의 진통이다.
그 문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나는 생명의 신비 앞에 진정으로 서 있는가? 나의 신앙은 생명을 낳는 자궁인가, 아니면 생명을 거부하는 돌무덤인가? 좁은 문은 열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편의를 위한 문이 아니라, 우리의 회심을 기다리는 문이다. 그 문을 통과하는 자만이 진정으로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잔칫상은 선택받은 자의 식탁이 아니라, 회심한 자의 눈물로 차려진 식탁이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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