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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0월 29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작성자최원석 쪽지 캡슐 작성일2025-10-29 조회수76 추천수2 반대(0) 신고

김건태 신부님_좁지만 통과해야 하는 문

 

 

오늘 예수님은 예루살렘 향해곧 성부의 뜻에 따라 구원사업을 완성하실 곳을 향해 길을 떠나십니다당신을 죽음에 부칠 예루살렘예수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성도(聖都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도읍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예수님의 호소는 그 강도를 더해 긴박감을 불러일으킵니다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너무 늦지 않도록 남은 시간만이라도 잘 활용하도록 이끌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이스라엘에서는 구원을 주제로 한 논쟁이 자주 펼쳐졌습니다어떤 이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후손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어떤 이들은 소수의 남은 자들만이 구원의 대상이 되리라 강변합니다예수님의 화두는 대부분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이기에사람들은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성부의 뜻에 의구심을 피력하는 질문입니다따라서 예수님은 구원을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일깨우시는 것으로 만족하십니다. ‘좁은 문이 주는 의미입니다교만으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사람제멋대로 살거나 육체적인 욕구에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도 영적으로 풍요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 등에게 그 문은 정말 좁을 뿐만 아니라 통과하기 어려운 문으로 다가올 것입니다그러나 겸손한 마음으로 살면서 육체적이며 물질적인 욕구를 자제하거나 멀리하는 사람에게 그 문은 좁기는 하지만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문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미래에는 별 관심이 없이이 세상의 재물을 축적하고 소비하는 데 급급하여 거기에서 안전과 행복을 찾도록 부추깁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육적으로만이 아니라영적으로 비대해져만 갑니다탐욕이나 갈망을 충족시켜 나가는 과정에서사람들은 결국 마음 둘레에 또 하나의 지방층을 쌓아놓는 결과를 초래하기 일쑤입니다영육간의 건강에 해로운 이 지방층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뚫고 들어설 가능성과 자리가 엷어 보입니다.

 

게다가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문이 닫혀 더는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밖에 있던 사람들은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하느님 말씀에 친숙한 사람들이기에잔칫상에 초대되었음이 분명하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주님문을 열어 주십시오.” 이들은 진심을 다해 살지 않으면서도 율법에 대한 지식이나 준수로 만족하고 있던 사람들이었기에,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는 답변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그분이 보내신 구세주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문이 닫히기 전에 좁은 문으로 통과할 수 있도록 몸집을 가볍게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이처럼 먼저 초대받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쫓겨나고뒤늦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현실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동쪽과 서쪽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하느님은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으며아드님의 십자가상 희생제물을 통하여 세상과 인류 구원을 이루어 내셨습니다그러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분명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몸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오늘 하루육적 또는 영적으로 불필요한 것들을 조금이라도 내려놓는 가운데몸을 가볍게 만들어나가는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3,22-30: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큰 울림을 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이 질문은 단순히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과연 누구에게 열려 있는지에 대한 인간적인 염려를 담고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수를 세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구원에 이르는가?’에 초점을 맞추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말씀하신다. 구원은 넓은 길을 편하게 걸어가듯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좁고 힘든 길을 끝까지 걸어야 얻는 은총임을 강조하신다. 

 

많은 이들이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항변하지만, 주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모른다.”(25.27절) 단호히 말씀하신다. 단순히 세례를 받고 미사에 참여하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삶의 열매, 곧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불의를 일삼았다.”(13, 27)라는 말은 단순히 큰 죄를 지은 경우만을 뜻하지 않는다. 신앙인의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작은 불의와 안일함에 안주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의 잔칫상에서 쫓겨나고, 오히려 온 세상 사방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들이 모여들어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주님을 입술로만 고백하고 삶으로 증언하지 않는 자들은 ‘나는 너희를 모른다’라는 두려운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분을 참되게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설교집 147,2)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덧붙인다: “좁은 문은 고통스럽고 험난하지만, 그 길 끝에는 영광이 있다. 넓은 길은 달콤하고 쉬워 보이나, 결국 파멸로 이끈다.”(마태오 복음 강해 23,1) 교부들의 가르침처럼, 구원은 단순히 외적인 행위가 아니라, 내적 변화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결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쉽지 않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사랑을 선택하며, 하느님의 뜻을 삶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길이다. 하지만, 이 길만이 주님께서 “나는 너를 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길이다.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초대된 우리는 단순히 “주님, 주님”하고 부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주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삶이 필요하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 각자는 다시금 좁은 문을 향한 걸음을 결심해야 하겠다.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갈 때,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기억하시며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라고 불러 주실 것이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행하는 한 가지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많은 처녀들이 옥수수 밭에 한 고랑씩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씩을 따는 일인데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를 딴 처녀가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한번 지나친 것은 다시 돌아 볼 수도 없고 다시 돌아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 하나만을 따와야 합니다.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딸 수도 없습니다.

기이한 일은 제일 좋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뒤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옷 하나를 고를 때도 백화점 내의 대부분의 옷가게를 한 번은 훑어보고

보아두었던 것을 다시 찾아갑니다. 

이런 능력이 있어야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다 훑어보신 다음에 괜찮게 보신 사람들을 뽑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주장이 칼뱅의 예정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천당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을 뽑아놓고 지옥 갈 사람들은 잘 자라도 죽이고 천당 갈 사람들은 못 자라도 결국엔 살린다는 주장입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앞뒤 안 가리시고 시간 속에 한정되어 미리 인간의 운명을 정하셔야 하는

약한 존재이실까요? 

 

오늘 독서에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예정설은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그 은총을 내려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미리 뽑으셨다는 말을 ‘칭의’라 하고, 그래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화’,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을 ‘성화’라 말합니다. 

 

이는 가톨릭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가톨릭교리는 의화가 칭의보다 앞선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며 위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예정설은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한 분으로 만드는 잘못된 가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짓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뽑아 지옥에 보내셨으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악해도 천국으로 보내시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지옥에 가게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의 본성을 예정설로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주신다는 순서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심이란 하느님께서 시간과 상관없이 한 번 훑어볼 능력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세상 시작 전부터 아셨습니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구원될 이들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사제로 살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미리 결정하시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것을 아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구원을 위해 미리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리 뽑힌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어떤 면을 보고 미리 뽑으시고 은총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말합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이웃사랑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 성욕이나 식욕에 대한 욕구,

높아짐이나 명예에 대한 욕구를 거스르는 삶이 좁은 문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마치 강 위에 떠 있는 배처럼 그 물살을 거스르지 않으면 저절로 흘러서 지옥의 폭포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거스를 줄 아는 사람을 미리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미리 뽑으신 이들을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리 결정하셔서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젓고 싶어 하는 사람을 미리 아셔서 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지가 먼저냐, 인간의 의지가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예정설은 하느님의 의지대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이고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시고 주님께서 결정해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은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뽑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뽑히지 않아서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뽑히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자신을 거스르려는 의지, 그 의지로 하루하루 자신의 욕망과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이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반면 자아와 타협하라든지, 자아를 찾고 실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미리 뽑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도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 자와의 욕구에 거슬러 좁은 문인 십자가의 영광으로 향할 때 주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병우 신부님_"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루카13,29) 

 

'나와 너의 구원을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오늘 복음(루카13,22-30)은 '구원과 멸망'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13,2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13,24)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들에게 오늘 복음이 매우 슬픈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 사는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니, 믿는 이들에게 참으로 무겁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오늘 복음이 먼저, '세례성사가 구원의 보증 수표가 아니고, 성직자와 수도자 등 교회의 신분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가 아니다.' 라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13,30) 라는 예수님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메시지, 곧 '언제나 지금(오늘) 첫째가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두의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고, 모두가 함께 노력해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주님, 이태원참사로 희생된 영혼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1열왕16,34)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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