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루카 13,33
진짜 유혹은 “길을 멈추라”
바리사이 몇 사람이 다가와 예수님께 말한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의 말은 친절한 충고처럼 들리지만, 사실상 “길을 멈추라”는 유혹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단호히 말씀하신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을 향해 가고 계신다.
나의 삶에도 외부의 위협과 두려움이 많다. 때로는 환경, 사람, 상황이 나를 옭아맨다. 하지만 사실 나를 가장 깊이 흔드는 유혹은 “이쯤에서 멈춰라”, “그만해도 돼”, “이 길이 정말 맞는 걸까?” 하는 내면의 속삭임이다. 그 속삭임은 부드럽고 현실적이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그것은 ‘공포’의 얼굴로 오지 않고, ‘이성’과 ‘안정’의 옷을 입고 다가온다. “이만하면 충분해.” “다른 길도 있잖아.” 하지만 주님은 알고 계셨다. 진짜 유혹은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내면의 체념이란 이름으로 다가오는 절망이라는 것을.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사가 도배를 하고 있는 미디어 세상에서 오늘 희망을 주는 기사를 만났다. 나는 기사에서 소개하고 있는 청년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길을 다시 본다. 그들은 이제 “봉사시간”을 채우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이 부여한 틀 안에서 “착한 일”을 수행하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과 새롭게 관계 맺는 존재로 나서고 있다. 누군가는 강화의 작은 마을에 들어가 “도와주러 온 손님”이 아니라 “잠시 살아보는 이웃”으로 머문다. 누군가는 예천의 논밭에서, 누군가는 동네 골목의 공방에서, 누군가는 ‘좋은 어른’을 찾는 캠페인에서 자신의 시간을 사회의 결로 엮고 있다. 이것은 ‘봉사’가 아니라 ‘존재로 참여하는 방식’이다. 이들은 삶을 수행이 아니라 관계의 예술로 다시 쓰고 있다.
그런데 이 길을 걷는 청년들에게도 유혹은 있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혼자 애쓴다고 세상이 달라질까?” “이쯤에서 멈춰도 괜찮지 않을까?” 이 속삭임은 헤로데의 위협보다 훨씬 교묘하다. 그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체념이다. 예수님께서 맞섰던 진짜 유혹이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두려움보다 위험한 것은 체념이다. 외부의 적보다 더 큰 적은, ‘내가 할 수 없다’는 마음의 포기다. 예수님은 그 유혹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이 말씀은 “멈추지 말라”는 외침이 아니라, “너의 존재로 살아라”는 부르심이다.
청년들이 지역에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법’을 다시 쓰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들은 결과를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를 위해, 성과가 아니라 존재를 위해 움직인다. 그들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이 시대의 복음이 되고 있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은 ‘사랑의 방향’이었고, 청년들이 다시 쓰는 길은 ‘연결의 방향’이다. 둘 다 외형보다 내면을, 성과보다 존재를 선택하는 길이다. 그 길이야말로 하느님이 세상 안에서 지금도 걷고 계신 길이다. 나는 청년들의 발걸음 속에서 나의 길을 돌아본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이 묵상은 다음 기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청년들이 다시 쓰는 '사회'의 의미" — 더버터(The Butter) https://www.thebutter.org/news/articleView.html?idxno=194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