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2025년 10월 30일 수원 교구청 묵상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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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최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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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25-10-30 | 조회수46 | 추천수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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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루카13,33)
'흔들리지 않는 믿음!'
오늘 복음(루카13,31-35)은 '죽음에 직면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13,31)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헤로데의 음모를 바리사이들로부터 전해 듣고, 헤로데를 여우라고 하시면서, 당신의 활동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시겠다는 의지를 밝히십니다.
이 헤로데는 예수님 탄생시 활동했던 헤로데 대왕의 아들로서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마저 죽이려고 합니다. 그런 상황 앞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13,33)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하셔야만 했던 일은 '기쁨과 자유와 해방'입니다. 곧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며, 죄로부터 해방이었습니다. 마침내는 우리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 나무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하느님 아버지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당신께서 걸어가셔야만 하는 이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충실하게 걸어가시겠다는 예수님의 결심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그 어떠한 것도) 그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39)
이 사도 바오로의 신앙고백이 나의 신앙고백이 되게 합시다!
(~1열왕18,23 전삼용 신부님_죽음의 위협 이기는 법: 새끼를 품은 암탉처럼
오늘 복음에서, 몇몇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겁을 주기 위해 아주 현실적인 경고를 합니다. "여기에서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빈말이 아닙니다. 헤로데 안티파스, 그는 이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실제적인 권력이자 '죽음의 위협'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헤로데'가 있습니다.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것처럼 보이는 직장 상사, 나의 미래를 위협하는 경제적 불안,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 혹은 나를 비난하는 여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헤로데'의 눈치를 보며, 그가 "너를 죽이려 한다"는 말 한마디에 두려워 떨며 발걸음을 멈춥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가서, '저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당대 최고의 권력자, 자신을 죽이려는 왕을 '여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이 당당함, 이 죽음을 초월한 자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 답을 바로 다음 말씀에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더냐?"
예수님의 관심은 '헤로데'라는 '여우'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병아리'들, 즉 당신의 자녀들에게 생명을 주는 '암탉'의 삶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올해 20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 1,700주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4세기 로마 제국은 '아리우스 이단'에게 삼켜졌습니다.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은 하느님이 아니시라, 하느님께서 만드신 첫 번째 피조물일 뿐이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심장을 겨누는 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우리의 구원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핵심 저서인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이 되게(신화, 神化) 하시려는 것"인데,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시라면 이 '신적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 황제 자신이 이 아리우스파에 물들었습니다. 황제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교에게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습니다. 황제가 교회의 '헤로데'가 된 것입니다. 제국의 모든 주교가 황제의 권력 앞에서 눈치를 보며 하나둘씩 타협하고 쓰러졌습니다.
바로 그때, 알렉산드리아의 젊은 아타나시우스가 홀로 일어섭니다. 그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부제로서 참석하여, "예수님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s)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황제는 그를 '여우'처럼 집요하게 물어뜯었습니다. 그는 네 명의 황제에 의해 무려 다섯 번이나 유배를 당했고, 17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와 망명지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모두가 그에게 "세상이 모두 아리우스파가 되었는데, 왜 당신 혼자 맞서는가?"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때 그는 교회사에 길이 남을 대답을 합니다. "Athanasius contra mundum!" (아타나시우스가 세상 전체에 맞서겠다!) 그는 '암탉'처럼 진리라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혹독한 '헤로데'를 만났던 한 가톨릭 신자, 고(故) 김대중 대통령도 있습니다. 그는 '민주주의'라는 '생명'을 국민들에게 주고자 싸웠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당대 최고의 '헤로데'들에게 끊임없이 생명을 위협받았습니다. 그 절정은 1973년 도쿄 납치 사건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당한 그는, 배(용금호)에 실려 캄캄한 밤바다로 끌려 나갔습니다. 그의 눈은 가려지고, 손발은 묶인 채 무거운 쇠붙이가 몸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바다에 수장(水葬)될, 죽음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여우'의 아가리 속이었습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그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강렬하게 빛나는, 눈부시게 하얀 예수님의 모습이 제 눈앞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분명히 느꼈습니다. '너는 살 것이다.' 그 순간, 저는 제가 살 것을 직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체험'한 바로 그 순간, 정체 모를 비행기가 배 위로 초저공 비행하며 붉은 조명탄을 터뜨렸고, 납치범들은 "들켰다"고 당황하며 그를 바다에 던지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암탉'처럼 국민들에게 '자유'라는 생명을 주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버지'께서 생명을 보장해 주심을 '체험'한 것입니다. 이 '체험' 이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1980년, 전두환이라는 또 다른 '헤로데'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을 때, 그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청주 교도소에서 "주님은 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 저는 제가 가는 이 길이 주님께서 가신 십자가의 길임을 믿으며,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과 섭리를 굳게 믿습니다."라는 옥중서신을 썼습니다. 그는 이미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의 주인이 저 '독재자'라는 '여우'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이심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암탉'처럼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진리의 생명'을, 김대중 대통령은 '자유의 생명'을 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는 삶' 속에서, 그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아버지를 '체험'했습니다. 이 '체험'이야말로 세상의 그 어떤 '헤로데'도 한낱 '여우'로 보이게 만드는 용기의 원천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합니까?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렇다면 '생명을 주는 존재'가 되십시오. 내가 '암탉'이 되어, 오늘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용서의 생명', '친절의 생명', '진실의 생명'을 내어주기 시작할 때, 우리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힘이 아닌, '아버지'께서 주시는 힘으로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리고 그 '체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여, 세상의 모든 '헤로데'를 향해 당당히 외치게 할 것입니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내 생명은 네 손에 있지 않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루카 13,31-35: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복음은 예수님의 마음속 깊은 사랑과 슬픔을 보여 준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들으시면서도, 주님은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분의 사명을 확실히 밝히신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단순히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구원의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32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명과 부활의 계획을 분명히 보여 준다. 주님은 이미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알고 계셨지만, 그런데도 인류 구원을 위해 묵묵히 걸어가신다.
또한,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33절) 하신 말씀은 예루살렘의 책임과 불순종을 드러낸다. 예루살렘은 많은 예언자의 피를 흘리게 한 도시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받은 축복을 거부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34절) 하신 탄식은, 하느님께서 인류를 향한 끊임없는 사랑과 보호의 의지를 보여 준다. 그러나 사람들의 거부로 인해 결국 심판과 버림이 따르게 됨을 경고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 속에 보여 주신 것은 하느님 자비의 인내다. 그분은 사람들을 자신의 날개 아래로 모으려 했으나, 그들의 굳은 마음이 이를 막았다.”(설교집 57,2)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덧붙인다: “주님은 이미 이루실 일을 아셨음에도, 사랑의 마음으로 끊임없이 사람들을 부르셨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순종하며 그분의 날개 아래 자신을 맡겨야 한다.”(루카 복음 강해 45,3)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시에 성찰하게 한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다가오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굳어 있으면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날개 아래로 모으려 하신 것처럼, 우리도 주변 사람들에게 보호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즉,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이고 순종할 때, 그리고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할 때, 비로소 주님의 보호와 은총 속에 살 수 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느낀다.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가 거부하면 그분의 뜻이 실현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과 사랑의 실천이다.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열어 주님의 날개 아래 머물며,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자. 아멘. 준엄한 하느님의 계획_김건태 신부님
예수님이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신 나자렛을 떠나,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복음 전파를 위한 공생활에 접어드신 때부터, 백성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끊임없이 그분을 죽음에 부치려 했으나, 이 지역은 그분이 수난과 죽음을 맞이하시고 부활하실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장소가 예루살렘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요한 세례자를 참수한 이래 백성을 만나기를 꺼렸던 헤로데, 정확하게 말해서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지를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든 이 지역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지체함이 없어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갈릴래아 주민이든 이 지역의 영주이든, 지금은 예수님을 죽음에 부칠 수 없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드러내는 날, 마귀들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이 하시는 일, 곧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당신의 길, 그러나 결국 당신 사명의 완성인 죽음으로 이끄는 길을 거침없이 걸어가십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예수님은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고, 온전한 자유의지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생명을 몸소 내주실 수도,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는 능력을 지니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증언, 곧 하느님 나라 선포는 예루살렘에서 절정에 이르러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예언한 대예언자이신 예수님은 예언자들과 같은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죽음에 부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 완성의 장소와 시간을 결정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로데의 협박은, 영악하고 교활하지만 힘이 없는 여우에 비교됨으로써 무시되기에 이릅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하느님의 계획에 순응(?)하는 예루살렘의 거부는 이제 정점을 찍기에 이릅니다. 유다 백성은 줄곧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성실함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여러 차례 경고와 함께 회개를 촉구했으나, 이 역시 거부로 일관했기에, 하느님은 그들의 종교적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전을 저버리시고, 끝내 그들을 이방인의 손에 넘기시는 방법으로 징벌을 가하셨습니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그렇게 했듯이, 예수님도 몸소 너무 늦지 않게 회개하도록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맺은 계약에 성실하지 못함을 끝까지 자랑했던 이 백성은 마음을 굳게 닫은 채, 그분의 경고와 회개 호소를 경청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의 보호와 자비, 한 마디로 하느님의 구원 선물을 마다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당신 말씀에 성실한 사람으로 머물기를, 부족함이 있다면 회개하며 용서를 청하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내주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주님께 모든 것을 내드리겠다는 마음 하나로 지켜나가는, 가슴 벅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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