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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루카 14,5
고통이 쉼을 얻는 날
예수님은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가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던 이는 바리사이들만이 아니었다. 수종증을 앓고 있던 한 사람. 그는 차마 예수님을 똑바로 바라보지는 못했겠지만, 예수님의 시선을 기다리고 의식하며 그분 앞에 서 있었다. 입으로 청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존재 자체로 말하고 있었다. "저를 보아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내 주변에도 있지 않을까. 차마 입으로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존재들. 늘 "괜찮아요"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지쳐 있는 동료. 늘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무너져 있는 친구. "나는 괜찮아"라며 버텨왔던, 바로 나 자신. 사랑은 말을 기다리지 않는다. 고통이 시선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 시선을 돌리는 순간 이미 사랑은 시작된다.
예수님이 묻는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14,3) 예수님의 질문은 "무엇이 옳은가"의 논쟁이 아니었다.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가"라는 물음이었고, 초대였다. 이 초대에 침묵이 흐른다. 이 침묵은 두려움의 침묵이다. 생명의 움직임 앞에서 경직된 양심의 침묵이다. 이 침묵이 왠지 익숙하다. 나 역시 두려움과 경직된 양심의 침묵으로 버티고 서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식일은 하느님의 쉼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런데 정작 하느님은 고통받는 이 앞에서 쉬지 않으신다. 그분의 쉼은 고통이 멈추는 곳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안식일은, 고통받는 이가 비로소 쉼을 얻는 날이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그렇다. 내 아들이라면, 내 소라면 당장 달려가 구할 것이다. 그런데 왜 눈앞의 이 사람 앞에서는 망설이는가. 그것은 그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가족도, 내 재산도 아닌 그저 '어떤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경계를 무너뜨리신다. 고통받는 이가 있다면, 그가 누구든, 그것이 언제든, 그 사람은 이미 "내 아들"이고 "내 이웃"이다.
오늘 나는 누구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고 있는가. 혹시 나도 바리사이들처럼, "지금은 때가 아니야", "내가 할 일이 아니야", "규칙상 어려워"라며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데 문득 깨닫는다. 어쩌면 오늘, 그 고통받는 이가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렇다면 오늘, 나 자신의 고통 앞에서도 침묵하지 말자. 나에게 더 이상 버티라고 요구하지 말자. 온몸이 퉁퉁 부어오른 모습 그대로 주님의 시선 앞에 서서 잠시 쉬자. 예수님이 수종증 앓는 이를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듯이, 나의 고통도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께 내어드리자. 그 사랑에 기대어 오늘은 내 고통도 좀 쉬자. 그 쉼 속에서 회복된 후에야... 나도 누군가의 고통을 향해 손 내밀 수 있을 것 같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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